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蔽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
不自見故明 不自是故彰 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長
夫惟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굽혀야 온전할 수 있고, 구부려야 펼 수 있으며, 오목해야 채울 수 있고, 낡아야 새로워 질 수 있고,
적어야 얻을 수 있고, 많으면 현혹될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와 같은 이치들을) 하나로 안아서 천하의 법도로 삼는다.
(고로 성인은) 스스로 내보이지 않으므로 (오히려) 분명하게 보이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므로 (옳음이) 밝혀지고,
스스로 공을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게 되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오래 유지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않으므로 온 천하가 이런 사람과는 다툴 수가 없다.
옛날의 이른 바 굽혀야 온전하다 하는 것이 어찌 헛된 말이었겠는가?
온전하게 돌아감에 정성을 쏟을 일이다.
枉 굽을 왕 窪 웅덩이 와 是 바를 시 彰 밝을 창 伐 칠 벌, 자랑할 벌 豈 어찌 기
※ 이경숙 해설
‘적어야 얻을 수 있고, 많으면 현혹될 뿐이다.’ 적게 구하면 쉽게 얻어지지만, 많은 것을 구하면 그만큼 마음이 바빠지고 수고롭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스스로 굽히고 능력을 드러내지 않으며, 언제나 낡은 채로 있으려 하고, 튀어나오지 않고 들어가 있으며, 항상 적게 구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성인이 천하의 법규로 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성인의 덕을 높이는 길임을 가르치고 있다.
남과 다투다가 해를 입거나, 한 몸에 화를 당하여 불구가 되거나 비명에 횡사하는 일 없이 한 몸 잘 보존하는 것에 정성을 쏟아, 온전한 채로 각자가 왔던 그 근본(만물이 나온 근본)으로 돌아 가야 한다.
‘도덕경’은 수련하고 도닦는 방법을 설명한 것도 아니요, 입신출세하는 요령을 설명한 것도 아니요, 죽어서 천당가거나 극락왕생을 하거나 내세에서 구원받는 방법을 설명해 놓은 것도 아니다. 현실 정치에 대한 약간의 이념이 있고, 그 나머지는 오로지 자기 한 몸을 잘 보존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라는 것이 수준 높은 설법도 아니요, 거창한 설교도 아니요, 오로지 ‘싸우지 말라(不爭)’는 당부뿐이다.
※ 나의 단상
不爭之道를 가르쳐 주는 대목이다.
공자는 仁을, 석가는 자비를, 예수는 사랑을 말했으나 노자는 부쟁, 즉 싸우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도덕경 전편에 걸쳐 사랑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노자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그 사람에 대한 의도적인 作爲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사람에 대한 無爲의 사랑이 바로 이 부쟁의 도다.
부쟁은 천하의 법이다.
현실적으로 우리같은 범인들이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사랑보다는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해야 서로 싸움을 피할 수 있는가?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옳다하지 않고, 스스로 공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면 된다.
나를 비우라는 말씀이다.
바람같이, 물같이, 허공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