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도경 11 無之用

무위당 2011. 1. 17. 08:34

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서른 개의 바퀴살을 하나의 살통으로 모아 바퀴를 만드는데, 

바퀴의 살들이 만든 빈 공간이 있음으로 바퀴가 능히 수레를 지고(지탱하여) 돌 수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만지는 대로 모양이 잡히는 찰흙의 성질이 

움푹 들어간 빈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그릇의 쓰임이 나온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문을 달기 위해 벽에 뚫은 구멍이 있기 때문에 

방으로서의 쓰임새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있는 것에서 이로움이 생기는 이유는 없는 것에서 쓰임새가 나오기 때문이다.

 

輻  바퀴살 복     轂  바퀴통 곡     埏  땅끝 연, 흙이길 연     埴  찰흙 식     鑿  뚫을 착    

戶  지게문 호, 집 호     牖  창 유

 

※ 이경숙 해설

이 장에서의 ‘무(無)’는 ‘비어있다’는 뜻이다.

 

살통에는 수레의 축이 끼이게 되므로, 축이 끼워진 살통은 이미 빈 것이 아니라 축이 속을 채우고 있는 상태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無)가 살통의 빔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무가 수레의 쓰임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無)를 무엇으로 채운 것에서 수레의 쓰임이 생긴다는 말이 된다.그러므로 살통은 수레의 쓰임을 만드는 ‘바퀴의 무(無)’가 아니다. 바퀴의 살들이 지나가는 그 공간-바퀴의 살들이 만들어 내는 그 공간이 곧 수레의 쓰임을 만드는 ‘바퀴의 무(無)’이다.

살의 공간이 꽉 찬 디스크형의 바퀴는 살로 받친 바퀴보다 약하고 무거워 효용성이 없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짜부러지거나 깨어진다. 접지면의 충격이나 하중의 힘이 한 점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디스크 전체로 분산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한 수레의 쓰임을 만드는 ‘바퀴의 무(無)’는 바퀴의 살들이 지나가는 바로 그 공간인 것이다.

 

그릇의 쓰임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찰흙의 성질(찰흙의 모양을 자주자재로 변형할 수 있는 것)에서 나온다. 바로 앞의 문장이 ‘서른개의 바퀴살을 모아 바퀴를 만든다.’였기 때문에 문장의 통일성을 기하는 데는 ‘찱흙을 이기어 그릇을 만든다’라고 읽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만약에 노자가 말하기를 ‘수레의 소용은 짐칸이나 사람이 올라타는 공간이 비었기 때문에 나오고, 방의 소용이 방안의 공간이 비었기 때문에 나온다’고 하였으면 이건 상당히 우스운 얘기다. 이것은 철학적 통찰도 아니고 과학적 관찰도 아니고 상식적인 소리도 아닌, 말할 필요나 가치가 전혀 없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방의 쓰임은 방의 빈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말할 필요나 가치가 전혀 없는 소리이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방의 쓰임은 바로 문과 창의 뚫어진 빈 자리에서 그 쓰임새가 나온다. 문과 창을 내지 않은 방은 방이 아니라 그냥 속이 빈 커다란 박스-밀폐된 공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이 있음으로써(有之利) 이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爲利) 없음으로써(無之以) 쓰임새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爲用).

그래서 노자가 이 장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는 쓰임새를 만들어 내는 것 처럼 ‘자신은 눈에 뜨이지 않으면서도 그가 있어야 되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도에 가까운 사람이고 성인에 근접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후기신(後其身)하고 외기신(外其身)하면서 생이불유(生而不有)하는 인간상에 대해 거듭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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