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도경 08 上善

무위당 2011. 1. 12. 08:35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선 중의 상은 물의 그것과 같다.

물의 선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하며 뭇 사람이 모이는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은 도와 가깝다 할 수 있다.

머물 때의 선은 땅을 살피는 것으로 하고, 마음을 간직하기를 그윽함으로써 선을 삼고, 

남과 어울릴 때는 어진 것으로 선을 삼고, 말을 할 때는 믿음으로써 선을 삼으며, 

올바름을 세우는 것으로 다스림의 선을 삼고, 능히 해낼 수 있느냐로 일할 때의 선을 삼으며, 

움직이는 것은 때를 가리는 것으로 선을 삼아야 하나니

모름지기 남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그리해야 허물 (우환)이 없을 것이다.

 

幾  기미(낌새) 기, 거의 기     尤  더욱 우, 허물 우 

 

※ 이경숙 해설

“상선”을 ‘최고의 선(善)’ 혹은 ‘가장 좋은 선’이라고 해석하면 안된다.

'상'은 '하'에 대해 상이다. 따라서 '상선'이라는 말도 '하선'이 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차선이 없는데 최선이 홀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노자는 바로 뒤에 '중선'과 '하선'들을 언급하고 있다.

 

'처중인지소오'에서 '처'는 어떤 장소에 있다는 뜻이다. '중인지소'는 사람이 많이 있는 장소 즉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오' 는 싫어하다는 뜻이다. 이것을 이어서 해석하면 '물은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머물기를(처하기를) 싫어한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앞에서 했던 말, '외기신' 이 왜 세상의 밖에 몸을 두는 것이라고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노자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한 것은 가장 상의 선을 취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부처가 제자들이나 사바 중생에게 출가를 권유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노자도 우리한테 속세를 떠나 산 속의 물처럼, 사람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있기를 권유하는 것이다. 그래야 도를 닦고 몸을 닦아서 ‘현빈’으로 가볼 거 아니냐.

 

'거선지'란 머물 때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어디서 살 것이냐 하는 거주지를 뜻할 뿐만 아니라 직장, 벼슬 등 살아가는 데 있어서 처하게 되는 모든 상황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다. '머무름에 있어서의 선은 그 땅을 살피는 데 있다' 라는 뜻이다. 땅은 꼭 대지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고 어떤 상황 전체를 말한다. 주변 상황를 잘 살피고 파악해서 거하라는 처세의 방편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칠선은 위의 ‘상선(上善) 즉 수선(水善)’과 대비 되는 것이다. 이 일곱 가지 선은 유가적인 것으로 노자의 가치와는 관계없다. 이 일곱 가지 선은 삶에는 필요한 것들이지만, 이것이 몸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칠선으로도 몸을 지키지 못하니, 그 다음에 바로 ‘부유부쟁(夫唯不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상선(上善 즉 水善)을 지켜 다투지 말고 그리하여 몸을 보존하라는 것이다.

 

 

 ※ 잠시 일어나는 물소용돌이  

물의 흐름은 물이 그것을 자각하든 못하든 끊임없습니다. 그리고 저 깊숙한 심층에서 흐름의 목적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 바다로 가는 것이지요. 물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바위와 부딪히고 때로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충격을 겪으며, 가끔 온천을 통해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자기중심을 잡기 위해 잠시 잠시 소용돌이를 만들어냅니다. 물은 어디로 흐르겠다고 결심하거나 그것을 항상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흐름에는 의식, 무의식적인 지향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저 거대한 바다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며 많은 사건들을 만나고 어떤 목표를 갖기도 합니다. 그러는 중에 비굴해지거나 우쭐해지는 상황이 오면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며’ 그러는 과정에서 ‘나’를 의식합니다. 그것은 흐르는 물이 무언가에 부딪혀 균형을 잡으려고 스스로 물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잠깐 잠깐 하나의 중심이 만들어졌다가는 다시 흩어지는 현상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 ‘나’라는 소용돌이가 전체 흐름의 주인인양 느낍니다.
그래서 순간 순간들의 임시적 물소용돌이를 영원한 자신인 것처럼 자신을 닦으려고도 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유지시키려고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핵심은, 모양 있고 구별되는 물소용돌이가 아니라 구별 없는 물 자체가 자신의 본원임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닦을 것 없는 진정한 ‘닦음’이 아닐까요? 그것은 그저 ‘확인’일 뿐입니다. 이후엔 쓰일 일만 남으니, 닦음도 일종의 쓰임일 뿐.

                                                                                                                 - 越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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