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도경 05 不仁

무위당 2011. 1. 4. 07:58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보듯이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고,

성인도 불인하여 백성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대하듯 간섭하여 말하지 않는다.

천지 사이의 공간이 어떠한가?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것은 어떠한가?

천지지간은 텅 비어서 찌그러지지 않을 뿐이지만 

절구와 피리가 속이 빈 것은 부진런히(과도하게) 움직일수록 (소용없는) 많은 것을 흘리고 있으니

그와 같이 말이 많을수록 자주 막히는 바이니 흉중에 담아두어 밝히지 않음만 못하니라.

 

芻  꼴 추     狗  개 구     猶  오히려 유     槖  전대 탁, 풀무 탁     籥  피리 약     

屈  굽을 굴     愈  더욱 유

芻狗 :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에 올리는 풀로 만든 개. 잡귀를 쫓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물건

 

※ 이경숙 해설

노자는 자연의 불인함이야말로 성인의 도와 합치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말을 천지와 성인은 비정하고 박정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천지와 성인은 비정과 온정, 혹은 인자하거나 매정하거나 하는 차원을 벗어나 있다는 의미이다. 노자가 보는 천지와 성인은 인자하지도 않으며 인자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다정한 것도 아니고 다정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가혹하지도 않고 가혹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노자가 말할 때의 '인'은 공자가 말할 때의 '인'과 전혀 다른 의미이다. '무위' 차원의 도를 보고 있는 노자의 눈에 공자의 인은 '유위'의 차원이다. 불경에 보면 '보살행을 행한다고 생각하면 이미 보살행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보살행을 행한다고 생각하고 행하는 행위는 이미 보살행과는 거리가 멀다' 는 말이다. 보살행을 행하고 자비를 베풀고 선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 마음의 의지가 불러오는 것이고 이것은 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위'에 속할 것이다. 만들어지는 것, 또는 지어내는 것이다. 진정한 보살행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살행을 행한다는 생각조차를 떠나 있는 것이다. 공자의 '인' 이란 군자지도의 수양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본래적인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상태' 와는 거리가 있다고 노자는 생각한다. 태양의 따스한 기운이 만물을 소생시키고 온갖 생명을 키워도 태양에게 자비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이 대지를 말리고 초목을 태워도 태양이 잔혹하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태양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할 뿐' 이고 스스로 그러한 태양이 때로는 생명을 살리고 때로는 생명을 죽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천지야 말로 무위자연의 차원으로서 지극한 것이라고 본다. 천지나 성인의 불인은 인자하지 않거나 매정하거나 잔인하다는 뜻이 아니라 꾸미거나 지어내거나 만들어내는 행위가 아닌 '무위' 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불인' 은 '무위' 의 다른 표현이다. 뒤의 18장에 가면 '대도폐유인의' 라 하는 말이 나오는데 '지극한 도가 없는 자리에 인의가 있다'는 의미이고, 또 38장에 나오는 '상덕부덕시이유덕 이란 말도 '지극한 덕은 부덕한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덕이 있다' 는 것도 비슷한 말들이다. 때문에 '천지불인' 이라는 말은 천지의 인이야말로 '최상의 인' 이라는 소리인 것이다. 이 말에 이어서 뒤따라 나오는 말들이 바로 이와 같은 '최상의 인'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이만물위추구' 이말은 만물을 풀강아지 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추구(풀강아지)라는 것은 중국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에 올리는 풀로 만든 개를 말한다. 잡귀를 쫓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물건이다. 이 풀강아지가 진짜로 잡귀를 쫓는지 귀한 신을 모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젯상에 올려진 풀강아지를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있기는 해야 하는 물건이지만 있다 해서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물건이 바로 추구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추구를 대하는 것이나 천지가 만물을 대하는 것이 비슷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잘못 헛짚으면 '하찮게 여긴다' '무시한다' '능멸한다' 라는 말로 오해할 수가 있다.

 

노자의 말뜻은 '천지는 인자하지도 않고, 인자 안 하지도 않고, 잔인하지도, 잔인 안 하지도 않다' 이다.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 추구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젯상에는 올려놓는 것이 관습이므로 올려놓긴 하지만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부러 하찮게 여길 이유도 없는 것이 추구라는 물건이다. 올려놓고 그저 있나 보다 하면 그뿐인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가 '추구' 라는 것의 의미를 찾기를 제사를 지낼 때는 소중히 여기다가 제사가 끝나면 길에 갖다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서 필요할 때는 소중히 여기고 일이 끝나면 매정하게 버리는 것에 대한 비유일 거라고 보고 있다. 노자의 말을 왜곡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 제사를 지내는 광경에 대한 상상력 부족이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도 추구가 그리 소중한 제물은 아닐 뿐더러 제사가 끝났다 해서 매정씩이나 한 마음을 가지고 일부러 홀대하는 물건도 아니다. 제사 지내는 사람이 추구를 소중히 받들거나 잔인하게 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저 별 생각 없이 올렸다가 별 생각 없이 내리는 물건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잔인하다'로 해석하면 안된다. 적당한 비유를 찾자면 '소가 닭 쳐다보듯이 한다' 는 말에 가까울 것이다. 닭을 쳐다보는 소의 눈길에는 애정도 연민도 호감도 적의도 없다. 그냥 무심한 눈길이다. 소가 닭을 쳐다보는 눈길이야말로 천지가 만물을 바라보는 눈이요, 성인이 백성을 바라보는 눈이다. 소가 마당을 가로질러 가다가 닭이 낳아놓은 알을 밟아서 깨뜨린다 해도 소가 닭한테 감정이 있어서 한 짓이 아니다. 소는 그저 마당을 지나 밭으로 걸어갔을 뿐이다. 배고픈 닭이 소똥 마른 것을 주워먹어도 소는 닭을 위해 똥을 싼 것이 아니다. 그냥 나오니까 쌌을 뿐이다. 닭도 소가 자기 알을 밟고 지나가도 소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 알이 깨졌구나. 저절로 깨졌겠지' 소똥을 맛있게 먹어도 소한테 감사할 줄 모른다. '먹이가 저절로 땅 위에 생겨났다' 고 생각할 뿐이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일어나고 절로 이루어졌을 뿐 '소가 했다느니, 닭 때문이라느니'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천지성인과 만물백성의 관계가 이런 소하고 닭과 같다는 것이 노자의 말씀이다. 반면에 공자의 인은 사람이 키우는 닭과 같다. 집도 지어주고 먹이도 주고 물도 주고 춥지 않게 덥지 않게 보살펴주지만 언젠가는 손에 칼을 들고 닭의 모가지를 딴다. 이게 공자의 인이다. 노자는 백성이 잘살도록 도와주지도 않고 못살게 굴지도 않는 게 최고의 통치라고 본다. 인이니 군자의 도리니 쓸데없는 나발을 불어대던 인간들이 죄없는 백성을 괴롭히고 전쟁터에 내몰고 재산을 뺏고 죽이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말고 아예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내버려두라는 심오고매한 노자의 주장이시다. 그러면 백성은 절로 행복할 것이요 자기가 행복해져도 그것을 통치자(성인)의 덕택으로 생각지 않고 내가 저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도의 정치라는 가르침이다. '백성이 자기가 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하게 하는 정치야말로 최고 최선의 정치라는 것'이 이 대목의 골자요, 노자 정치사상의 핵심이다.

 

'탁' 자는 옥편을 찾아보면 '전대 탁' 절구 탁' 이다. '약'은 '피리 약' 이다. 그러니까 '탁약'은 '절구와 피리' 다. 이 탁과 약을 붙여서 '탁약' 이라고 하면 '풀무' 라는 단어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탁' 과 '약'을 절구와 피리라는 두 개의 단어로 볼 것이냐, 아니면 '탁약' 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런 때는 문장의 앞 뒤 관계와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에 어느 쪽이 자연스럽고 논리적으로 순접하는 해석이 가능하느냐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풀무라는 기계에서 나오는 바람은 다다익선 이고 강강익선 이다. 많이 나오고 세게 나올수록 좋은 것이 풀무의 바람이다. 만약에 천지지간에 비유한 것이 풀무라면 그리고 천지지간은 무엇이든지 많이 만들어내고 세게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뜻이라면 사람의 말도 많을수록 좋은 것이 되어야 앞뒤가 맞는 소리가 된다. 그런데 바로 뒤에 노자가 하는 말은 '다언삭궁 불여수중' 이란 말이다. '말이 많으면 금세 막히는 법이니 가슴에 담아둠만 못하다' 이다. 이 말을 가지고 유추해 보면 노자는 '뭔가 많이 내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풀무'는 아닌 것이다. 반면에 절구와 피리는 이 경우에 대단히 적합한 비유가 된다. 절구는 너무 심하게 절구질을 하면 곡물 가루가 밖으로 마구 튀어나오고 피리도 너무 힘껏 불어 젖히면 쓸데없는 고음에 깨지는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많이 나오는 것은 좋지 않다' 는 말에 어울리는 비유는 '풀무'가 아니라 '절구와 피리' 이다. 앞 뒤 문장의 연결 관계도 그렇지만 문장 자체의 구조로 볼 때도 '탁' 과 '약' 은 '절구와 피리' 로 볼 수밖에 없다. '탁약'이 풀무라고 하면 '천지지간 기약탁약(天地之間 其若槖籥)' 이라 해버리면 그만이다.  '유'자는 움직일 유' , 또는 '원숭이 유'자인데 '움직일 동' 과는 쓰임새가 약간 다르다. 원숭이 까불 듯 촐싹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하는 글자다. 노자는 이 '유'를 절구질과 피리 부는 동작을 묘사하는 글자로 고른 것이다. 그래서 '유탁약' 은 '절구질 과 피리 부는 일' 로 옮길 수 있다. '기'를 붙여서 읽으면 '기유'는 '그 움직임은'이 된다. 맨 뒤의 감탄어조사 '호'와 호응해서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동작이란!'하는 뜻이 되는 것이다. 물론 생략된 말은 '얼마나 경망스러운 것이냐?'가 되겠다. 이런 문장을 '유'는 버리고 '호'자는 빼버리고 풀무라 하면 이건 번역이 아니라 황당무계한 창작이다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을 ‘천지지간 허이불굴 기유탁약호 동이유출’로 어순을 바로 잡으면 아주 쉽게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하늘과 땅 사이는 텅 비어 있어 찌그러지지 않을 뿐이나, 절구질이나 피리를 불 때는 찧거나 불수록 튀어나온다(곡물 찌꺼기와 소리)'라는 뜻이다. 천지지간이라는 대자연의 공간과 절구나 피리처럼 인위적으로 파놓은 공간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광대한 공간은 텅 비어 있어서 그것(빔)의 소용은 다만 찌그러지지 않을 뿐이지만 절구와 피리의 속은 똑같이 비어 있으면서도 그것은 움직일수록 무엇인가가 경망스럽게 튀어나온다는 뜻이다. 고로 같은 '빔' 이라도 자연의 '빔' 과 인공적인 '빔' 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움직일수록 경망스럽게 뭔가가 튀어나오는 절구나 피리 같은 '빔' 이 되지 말고, 천지지간의 '빔' 처럼 그저 찌부러지지 않으면서 고요한, 그런 '빔'을 가지라는 가르침이다.

절구나 피리를 불 때 너무 세게 하면 곡식가루나 음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이 '말이 많으면 금세 막히니 가슴속에 아껴둠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만물을 보고 아무 소리 안하고 성인이 백성을 간섭하지 않으며 천지간의 공간이 비어 있음으로써 찌그러지지 않는 것을 본받고, 절구와 피리처럼 경망되이 움직여 쏟아내지 마라. 모름지기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는 법이니 모쪼록 말을 아껴 가슴속에 담아뒤라. 이런 가르침이다. 사람이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틀린 말이 많아지고, 거짓말이 많아지고, 책임 못 질 말이 많아지는 이 세 가지 때문에 사람이 궁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천지지간은 텅 비었으므로 굽히지 않는데, 사람은 절구나 피리와 같이 경망되이 움직이고 말이 많아서 자주 궁지에 몰리는 도다. 모름지기 다언삭궁이니 불여수중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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