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도경 06 玄牝

무위당 2011. 1. 5. 09:22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계곡(무극, 태허)이 있으니 그 골짜기의 이름을 일러 현빈이라 하느니라.

현빈의 문이야말로 천지가 시작된 곳이니

그 이어짐이 실낱 같아서 어찌 보면 있는 것도 같지만 쓰임새는 없다.

 

綿  솜 면

 

※ 이경숙 해설

곡신불사 시위현빈’ 노자는《도덕경》 5천 글자를 통틀어 다른 사람들이 쓴 적이 있거나 널리 쓰이는 의미태의 고유명사를 단 한 개도 사용하지 않는다. 《도덕경》에 나오는 모든 의미태의 고유명사는 모두 노자의 창작어들이다. 노자가 지어낸 단어들이어서 이런 고유명사가 뭔지를 사람들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해석이 구구하고 중구난방 지 멋대로다. 이런 조어의 능력이 뛰어나기로 지나인보다는 오히려 고대 인도인이다. 불경을 읽어보면 말을 만들어내는 어휘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문학적 가치만으로도 인류의 보고라 할 만하다. 특히 이름을 지어내는 데는 도가 텄다. 부처님한테 놀라는 게 바로 작명력이다. 온갖 대상 온갖 사물에 수천 수만 가지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데 정말 환상적이다. 신들의 이름부터 어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난해한 철학적 개념에 대한 명칭까지 멋지게 이름들을 척척 만들어 붙이는데, 불경에 등장하는 신과 보살, 신장들의 이름만 해도 기억을 다 못 할 정도다. 거기다가 해탈이니 열반이니, 반야니, 업이니, 보니 하는 것들도 전부 다 지어낸 말들이거든. 깨달음 한 가지를 가지고 만들어 붙인 이름이 수백 가지는 될 거야. 하지만 불교는 이런 이름들에 대한 설명이 그 작명자인 부처님의 설명을 통해서 밝혀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고, 또 그 의미를 놓고 이설이 분분할 이유가 별로 없다. 반면에 《도덕경》은 원문만 전할 뿐 노자가 이에 대해 설명해놓은 강의록이 전해지지도 않고 노자로부터 직접 설명을 들은 제자도 없어서 겨우 왕필이 해놓은 주해가 고작이다. 그런데 왕필의 주해라는 것이 불경처럼 직접 그 원작자의 강의를 들은 제자가 기록한 게 아니고 왕필이 지 멋대로 풀어놓은 것이어서 보다시피 별 신빙성이 없는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노자의 창조어들이 이 6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노자 연구가들이 이 문장의 처음에 나오는 '곡신'을 이런 고유명사로 착각한 나머지 이 장의 의미가 오늘날까지 제대로 풀어지지 못했다.

 

뒤의 현빈은 노자가 지어낸 고유명사지만 '곡신' 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게 헷갈려서 '곡신' 이 도대체 뭐냐? 해서 2천 년 동안 별의별 해석이 난무했다. 지금 중국이나 대만의 내노라하는 동양학자들 중에는 '곡신'을 단전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이 기공 수련의 요체라는 것이다. 앞으로도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이상한 글들이 나오는데 그런 것을 죄다 신선술의 비결로 푸는 엄청난 오역을 하는 경우가 한 둘이 아니다.

 

‘곡신불사’ 바로 뒤에 오는 문장이 '시위현빈'이다. '검을 현' '계곡 빈' 이다. 그래서 '시위현빈'은 '이것을 일컬어 검은 계곡이라 한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연 앞 문장의 의미는 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계곡' 에 대한 이야기라야 된다. 때문에 이 '곡신불사'의 뜻은 '계곡의 신이 죽지 않는다' 가 아니고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을 말한다. 띄어쓰기를 해서 읽으면 '곡, 신불사'이다.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이 뭐냐? 바로 신선의 고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고, 해탈의 세계이고, 부처가 사는 곳이고, 무릉도원이고 무극이며 태허의 자리이다.

 

그렇다면 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불교적으로 유추하면 그것은 해탈의 경지고 도피안이다. 해탈이란 인연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인연법이야말로 모든 존재를 현상계에 내보내는 세계의 법칙이다. 인연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의 저편으로 건너 간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과의 영원하고 완전한 작별이다. 부처는 이 세계와 저쪽의 경계를 넘어 가버린 사람이다. 그래서 실제로 부처는 우리와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아무리 부처님 전에 엎드려 애처롭게 빌어도 부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만약에 그 소리가 들리고 그 간절한 하소연에 부처의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있다면 부처와 나는 인연에 의해 연결되는 상대자가 된다. 부처 역시도 나와의 인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부처의 해탈은 거짓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너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즉 노자가 말하는 도의 존재로 돌아가버린 사람이어서 너희에게는 무용이라는 것을 확실히 했던 것이다. 그래서 죽은 부처한테 절하고 공양을 하고 염불을 해봤자 기대할 게 없다는 얘기다. 우리한테 소용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은 부처가 아니라 부처가 남긴 가르침이고 그 말씀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등불로 삼으라고 했던 것이다.

부처가 가 계신 그런 곳을 노자는 일컬어 '현빈'이라 한다.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곳. 그런 곳은 인연에 따라 성주괴공하는 이 세계와는 다른 곳이다. 그러나 그곳이야 말로 이 세계가 있게 된 근본이다. 이 세계가 그곳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이다. 그곳이 바로 열반의 세계요, 피안이며, 도이며, 현빈이다. 바로 노자의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이 그 말이다. '현빈의 들어가는 입구야말로 천지의 근본이다' 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넘어 가버린 그 문이 바로 '현빈지문' 이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중생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에 뒤돌아보다가 차마 넘지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린 바로 그 자리가 '현빈지문' 이다. 그 문을 여는 데는 정말로 모질고 독한 마음이 필요하다. 두고가는 형제들, 자식들, 모든 사랑했던 사람들, 생명의 유혹과 그 본능까지도 다스려 잡지 못하면 넘지 못하는 문이다.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이야말로 우주의 근본 자리이고 영원불사하는 세계이며 고통과 슬픔과 비참이 없는 곳이며 우주와 내가 일체가 되는 자리이다. 기독교인이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가 황금보좌에 앉아 있고 그 우편에 베드로가, 왼편에 바울이 있으며 천사 미카엘이 그 날개로 이 세계를 덮고 서 있는 그 장소가 바로 '현빈' 이다.

 

'용지불근' 불근은 말 그대로 '부지런하지 않음' 이다. 달리 말하면 '나태하고 게으른 것' 이 '불근' 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쓰임에는 게으르다' 는 뜻이다. '혹불영' , '채워져 있지 않다' 와 맥락을 같이 하는 글이다. 즉 '현빈' 이라는 것은 '천지의 근원으로서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지만 쓰임에는 게으른 것' 이라고 노자는 다시 한번 말하고 있다. 때문에 '약' 은 '∼이지만' 또는 '∼일뿐' 이라는 어조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면면약존 용지불근'을 보기 좋게 옮기면 '가늘게 이어져올 뿐 쓰임은 없는니라' 가 된다. '용지불근' 은 곧 '이용지혹불영' 이고 '도무용' 이다. 부처의 해탈은 윤회의 사슬을 끊은 한 개인의 해방이고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곧 이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차안과 피안의 강은 너무나 넓고 깊어서 한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이다. 피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차안의 입장에서 피안은 아무 소용이 없는 땅이다. 그것은 그 곳으로 건너 가버린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아직 차안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무용지지다. 오직 한 가지, 그곳으로 갈 수 있는 희망으로만 존재한다. 나무 한 그루, 석탄 한 조각, 과일 한 개 그 곳으로부터 가져올 수 없음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용지혹불영' '용지불근' 이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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