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도경 02 無爲

무위당 2010. 12. 29. 16:48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온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꾸며진 아름다움이면, 이것은 나쁜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실은 꾸며진 선(위선)이면, 이것은 선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드러내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견주어 지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여 보고, 음악과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성인은 꾸미지 않고 일을 처리하며, 말없이 가르침이 되게 실천하며,

천하 만물을 자기 손으로 만든다 해도 말이 없다.(떠들어 자랑삼지 않는다)

살면서도 없는 듯이 하고 (드러내지 않고), 꾸며서 지어내는 것(爲)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차지하지 않음이니,

대저, 공을 쌓아두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떠나지 아니한다.

 

斯 이 사 (어조사 이것)     弗  아닐 불

 

※ 이경숙 해설

이 대목은 위(爲)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앞으로 노자가 계속 써야 될 '위'라는 글자에 대한 의미를 오해하지 말라고 알아듣기 좋도록 예을 적어 놓은 대목이다. “아름답고”, “추하고”, “선하고”, 불선하고“ 등이 주제가 아니다.

노자는 아름다움과 착함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추함과 악함을 멀리하지도 않는다. 노자는 미추와 선악의 구별 자체를 싫어 한 사람이다. 뒷장에 가면 '너와 나의 거리가 얼마이며, 선과 악의 거리가 얼마이냐?' 라는 말이 나오는데, 노자는 미추와 선악을 함께 인정하고 수용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노자가 가장 경계했던 것은 바로 '위'다. 악을 멀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위선’을 멀리했고, '추'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위미'를 미워했다. 자연이란 '저절로 그러함이고' , 무위는 '있는 그대로' 이다. 그래서 '무위자연' 이란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함'을 맗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못난 것은 못난대로, 착한 것은 착한 대로, 악한 것은 악한대로, 세상 모든 것이 지 생겨먹은 그대로 '저절로 그러한 상태' 가 바로 노자가 말하는 도의 상태이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이 '위'를 '꾸며놓은 것, 가식해 놓은 것, 위장해 놓은 것, 사실과 다르게 만들어 놓은 것' 이라는 의미로 거의 일관되게 쓰고 있다. 즉 ‘무위’는 '꾸미지 않는 것, 가식하지 않는 것, 위장하지 않는 것,  사실과 다르게 만들지 않는 것-있는 그대로' 등의 뜻이다.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이란 뜻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즉 '무위'를 '무행' 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유가 있어야 무가 성립이 되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 수 있고, 높은 것이 있어야 낮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에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놓고 사람을 속이면 진짜 없음이 나타날 수가 없고, 실제로는 짧은 것을 긴 것처럼 꾸며놓고 속이면 진짜로 긴 것이 긴 줄을 모르게 된다. 이것을 미와 선에 소급해서 말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으로 믿게 만들면 진짜 아름다운 것이 드러날 수가 없고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한 것처럼 꾸며서 속이면 진짜 선한 것이 선한 줄을 모르게 된다. 그러하므로 아름다움을 지어내거나 선을 가장하는 것은 나쁜 짓이니라.

악, 불선 이게 바로 노자가 유무, 난이, 장단, 고하, 음성, 전후를 죽 나열해 말한 요지다.

성인은 일을 할 때 말로써 꾸미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 사람들을 가르친다

 

노자의 위는 '꾸밈이 있는 것'이고 무위는 '있는 그대로' 를 의미하는 말이다. 뭘 하고 안하고의 뜻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무위요, 추한 것이 있는 그대로 추한 것도 무위다. 선한 것도 무위요, 악한 그대로 드러난 악도 무위다. 노자는 미추와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위장되거나 악한 것이 선한 것을 가장하는 것을 유위라 하여 멀리할 뿐이다.

선악,미추,장단,고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모두 무위인 것이다. 위란 꾸밈이요, 무위는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남이다.

 

노자는 말로 꾸며서 사람들을 속이지 말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 가르치라고 권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행불언지교'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가 아니라 '하라'고 말한다. 하되, 말로 꾸미거나 속이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말하고 있다. 노자사상의 핵심은 바로 이 ‘행’에 있다. '무위의 행' 이것이 바로 노자사상이다. 꾸미거나 지어내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함이 바로 무위의 행이다. 말로 속이고 말로 사람을 부려먹지 않고 스스로 실천하는 행이 바로 무위의 행인 것이다.

성인은 자기를 내세워 자랑하지 아니하고, 드러내지 아니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지 결코 꾸미거나 지어내는 법이 없으며, 공을 이루어도 그 공을 차지 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없는 듯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인의 사는 모습' 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공을 쌓아두지 않기(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그 공이) 떠나지 아니한다(없어지지 않는다 또는 흩어지지 않는다).

 

 

※ 나의 단상

인류 역사상 진리로 인식되어 왔던 절대 세계가 아인쉬타인에 의해 상대 세계로 인식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불과 백여년전이다. 그러나 노자는 오래전에 이 천하는 상대적인 세계임을 깨달았다. 진리란 무엇인가?

 

※ 지산겸

반대되는 상대가 존재해야 비로소 자신도 존재하는 관계를 대대관계(待對關係)라고 합니다. 음과 양이 그렇고, 빛과 그림자가 그러하며, 강함과 약함이 그러합니다. 모든 ‘앎과 느낌’이 가능한 것은 이런 대대관계를 통해서입니다. 즉, 나와 대상이라는 분리된 관계를 통해서만 ‘느껴지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내장산 단풍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것이 떠오릅니다. 그 전까지는 그저 ‘아름다움’ 속에 있되 그토록 아름다운 줄 ‘몰랐으나’ 시일이 지난 어느 때부터 진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며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미추의 비교를 통한 ‘기준’이 내면에 ‘나’로 자리했기 때문입니다. 그 과거가 현재와의 사이에 분리감을 만들고 대상으로서의 외부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와같이 우리의 안과 밖도 대대관계를 이룰 때가 많습니다. 즉, 겉으로 지극히 겸손해 보일 때는 속으로 자만이 자라고 있을 수 있고, 겉으로 오만이 두드러질 때는 속으로 자신이 알아채지 못할 비굴이 자리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은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상호보완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겸손은 무엇일까요? 안과 밖이 서로 대대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살피며, 또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내안에 쌓인 과거의 기준에 의한 것임을 알아차려 그로부터 벗어날 때일 것입니다. 겉은 배우려는 마음으로 수용적인 자세(地)가 되고, 안은 그동안 삶을 통해 경험한 탁월성(山)으로 민감하게 깨어있는 것, 그것이 바로 주역의 지산겸(地山謙)이 말하는 진정한 겸손입니다.
                                                                                                                              - 越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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