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덕경 75 求生

무위당 2011. 5. 27. 08:58

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是以饑

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民之輕死 以其求生之厚 是以輕死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

 

백성의 기근은 위(나라, 통치자)에서 세금을 과중하게 받아먹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백성이 굶주린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위(통치자)에 꾸밈(작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스리기 어렵다.

백성들이 가볍게 죽는 것은 살고자 하는 욕구가 두터운 때문이다. 그 때문에 가볍게 죽는다.

대저, 오로지 살려고 꾸며대지 않는 것이 생을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현명한 것이다.

 

※ 이경숙 해설

여기서 ‘상(上)’은 백성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통치 계급을 뜻한다. 백성이 굶주리는 이유는 오직 통치 계급이 세금을 과중하게 징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앞뒤로 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하고 있다. 또한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이유는 통치자가 백성에게 꾸며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민지경사(民之輕死) 이기구생지후(以其求生之厚) 시이경사(是以輕死)’, 그런데 이 구절은 약간 이상하다. 백성들의 죽음이 가벼운 이유는 그들이 삶을 구하는 욕구가 두터운 탓이라고 한다. 일반 백성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누구나 대동소이하다. 모두 어떻든지 잘살고, 오래 살려고 아둥바둥 몸부림치는 것이 민초들의 삶이다. 위에 있는 높은 사람들에 비해 보면 그다지 낙이 있는 삶도 아니고 행복한 생활도 아닌 비참하고 힘든 고역의 일상임에도 그 생을 가벼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노자는 그렇게 발버둥치는 사람들이어서 오히려 죽음이 가볍다고 말하는 것이다. 삶을 붙잡고, 좀 더 잘살아 보려고 발악을 한다고 헤서 그 생이 더 가치롭거나 귀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럴수록 사람은 더 초라하고, 더 무가치하고, 가벼운 것이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노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爲)’라는 글자를 주로 ‘꾸민다’는 말로 번역을 하는데, ‘꾸민다’는 말은 비단 ‘속인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일을 꾸미는 것’, ‘도모하는 것’, ‘꾀하는 것’ 등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위(爲)’라는 한자의 의미를 우리말로 옮길 때 ‘꾸민다’보다 더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구절의 ‘생위자(生爲者)’의 번역을 ‘생을 꾸미는자’로 옮겼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지나치고 무리한 것을 추구하는 자세’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이 장은 그런 욕심이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인생을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 집착하는 사람보다 현명하다는 말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이 장에서 노자가 말하는 ‘위(上)’의 탐욕과 ‘위(爲)’의 폐해 그리고 위정자들의 통치 아래서 백성들이 생에 집착하여 살다가 보잘것 없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비극을 노래한 이야기가 “장자”‘칙양(則陽)’편에 있다. 아주 명문이며, 음미할 만한 말들이 나온다.

 

백구(栢矩), 제나라 죄수의 죽음을 슬퍼함

백구(栢矩)가 노자에게 배우고 있을 때 말하였다. “청컨대 온 천하를 다니며 노닐게 해주십시오.” 노자가 말하였다. “그만 두어라. 천하라는 것도 이 곳이나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시 요청하니 노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어디서부터 유람을 시작하겠는가?” “제나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백구가 제나라로 갔을 때, 처형당한 죄인을 보았다. 그는 시체를 끌어안고 자기의 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고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아아, 그대여! 천하에는 큰 재난이 많은데 그대 홀로 먼저 당했구나. 그대는 도둑질을 한 것인가? 살인을 한 것인가? 영예와 치욕을 따지게 된 연후에야 고민이 생겨나는 것이다. 돈과 재물을 모은 연후에야 다툼이 있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고민할 일들을 내세우고, 서로 다툴 일들을 모아 놓고서, 사람들을 쉴새없이 곤궁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니 그대와 같은 처지를 당하지 않으려 해도 어찌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의 임금들은 이득은 백성에게 주고, 손실은 자기가 가졌다. 정당한 것은 백성의 것으로 하고, 잘못된 것은 자기 것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자기에게 실수가 있을 때에는 물러나서 스스로를 책하였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숨어서 일을 결정하고는 알지 못하는 자들을 우롱하며, 크게 어려운 일을 하게 만들고는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을 처벌한다. 먼 길을 가게 하고는 이르지 못하는 자들을 처형한다. 그리고 백성들의 지혜와 능력이 다하면 곧 거짓으로 일을 꾸민다. 위정자가 날로 거짓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백성들이 어찌 거짓된 일을 하지 않겠는가? 힘이 부족하게 되면 속이게 되고, 지혜가 부족하게 되면 거짓말을 하게 되며, 재물이 부족하게 되면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도둑질을 하는 것을 두고 누구에게 책임을 묻겠는가?”

 

 

※ 죽음에 대한 욕구 - 오쇼 도마복음 강의중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높은 산 위에 견고하게

잘 세워진 성채는

무너질 수 없고 결코 숨겨질 수도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두 귀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거나

숨겨진 곳에 두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등경 위에 얹어놓아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도록 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두 사람 모두 도랑에 빠질 것이다.

 

예수는 왜 이 ‘성채’라는 말을 썼는가? 현재 상태의 그대는 늘 두려움이나 불안속에, 그리고 위험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사는 골짜기는 유령들과 그림자들, 그리고 적들과 증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파리 한 마리가 슈퍼마켓 근처를 날고 있었다, 그 슈퍼마켓 윈도우에는 살충제 광고가 하나 붙어 있었다, 파리는 그 선전 문구를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크고 붉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파리를 즉석에서 죽이는 최신식 스프레이, 품질보증.“ 파리는 그 광고를 읽고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날아갔다. “세상은 너무 많은 증오로 가득 차 있단 말이야.” 그대들은 골짜기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는 죽음만이 보증되어 있다, 그대들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고 있다, 아무것도 보증된 것은 없다, 오직 죽음만이 보증되어 있다. 그대들은 삶 속에서 죽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관찰해 본 일이 있는가?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대에게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죽음에 대한 보증뿐이다, 그것뿐이다, 골짜기에서는 이것만이 확실하다. 그대는 죽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그밖의 모든 것은 불확실하며 우연일 뿐이다, 그것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도대체 어떤 형태의 삶이기에 죽음만이 보증되어 있단 말인가? 그럴 수밖에 없다, 죽음은 오직 어둠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오직 무의식 속에서만 존재한다, 무의식은 죽음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대가 무의식 상태가 되고 싶어할 때 그대는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내부에는 죽음에 대한 깊은 충동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높은 곳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프로이드는 그의 말년에 한가지 심오한 사실에 직면했다, 그는 그것을 타나토스(thanatos), ‘죽음에 대한 욕구’라고 불렀다, 그는 일생 동안 리비도 (libido)에 대해서 생각해 왔다, 즉 인간은 삶에 대한 의지로서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그 삶에 대한 의지를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그는 점점 더 확신을 잃게 되었다, 삶에 대한 의지를 이해하면 할수록, 그는 그 깊은 곳에는 죽음에 대한 의지가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일차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 일원론적인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리가였기 때문이다, 리비도의 배후에 - 삶에 대한 욕망과 삶에 대한 의지 배후에 - 죽음에 대한 의지, 타나토스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모순이었다. 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붓다가 언제나 말해왔던 것, 예수가 말해 왔던 것이었다, 즉, 지금 상태의 그대는 너무나 쓸모 없고 그대의 삶 전체는 무의미하다, 욕구불만에 꽉찬 나머지 그대는 죽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무의식 상태가 되고 싶어 무언가를 할 때면 거기엔 언제나 죽음에 대한 욕구가 있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일시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단 며칠만이라도 잠자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잠은 일종의 일시적인 죽음이다. 그대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 만일 그대가 날마다 8시간씩 죽을 수 없다면 그대는 다음날 살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삶이 그토록 혼란스럽고, 산다는 것이 도무지 축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오히려 축복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자신을 잃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기쁨을 느낀다, 그대가 만일 정치운동 속에서 자기를 잃는다면, 그대가 만일 나치에 가담하여 군중 속에서 자기를 잃는다면, 그것은 죽어 있는 상태이기에 그대는 기분이 좋아진다, 거기에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군중이 있을 뿐이다. 독재자가 성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서조차 독재자들은 성공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쉽게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이 늘 존재하는 이유이며 전쟁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존재할 것이다, 그대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인간은 스스로 변형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기 때문에 전쟁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대들은 죽고 싶어한다, 그리고 죽이고 싶어한다, 산다는 것이 너무도 무거운 짐이기 때문에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인다, 그대가 지금까지 자살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은 그대가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 단지 그대는 두려울 뿐이다, 그대는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늘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간다, 정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거기에 더욱더 풍요로운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약속을 한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넘치는 생명을 주겠다.“ 예수는 말한다. “나는 생명이다, 위대한 생명이다, 나에게 오라!” 그러나 예수에게 가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골짜기 속에다, 삶의 어두운 길에다 많은 투자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생명력 있는 삶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대들은 지나치게 생명력 있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편들을 마련한다, 그대는 최소한의 삶의 영역 안에서 존재한다, 그대는 마치 자동인형처럼 기계적으로 살아간다, 그대는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변환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생명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생명력 있는 삶을 살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전쟁은 계속될 것이고 폭력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로 죽일 것이다, 그러한 모든 노력은 결국 지구 전체를 자살로 몰고 갈 수 있는 정치를 만들어 냈다. 수소폭탄이 바로 그것이다, 왜 과학자들은 그들의 전 생애를 바쳐 끊임없이 파괴적인 것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헌신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 내부에 있는 깊은 욕망 때문이다. 죽는 것, 어떻게 해서든 죽고자하는 욕망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의식적인 것이라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변형 시키기 시작할 것이다, 여러 번이나 그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리스의 철학자 필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일 큰 축복은 태어 나지 않는 것이고, 두번째 축복은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것이다.“ 그는 이 두 가지만이 유일한 축복이라고 말한다, 첫째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같은 행운을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은 이미 태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번째 것만이 가능하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죽는 일, 그러나 필로 자신은 97세까지 살았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자살하지 않는 겁니까?” 필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죽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참고 사는 것이다.“ 자살은 하나의 뿌리 깊은 본능이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낄 때 그대는 순간적으로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종교적인 사람이란 이러한 죽음에 대한 깊은 의지가 자신의 내부에 숨겨져 있음을 알아차린 사람을 말한다. 왜 죽음에 대한 의지가 거기에 있는 것인가? 그대는 그대 자신 속에 좀더 많은 빛을 가져와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대는 죽음이 그대 내면의 구석에서 끊임없이 그대를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그대가 죽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70년에 걸쳐서 천천히 죽어간다, 죽음이란 최후에 오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탄생과 함께 시작 된다, 호흡 하나하나, 순간순간이 단지 죽음의 연속일 뿐이다, 그것은 너무도 느린 과정이라서 70년이 걸려야 완성된다. 그대는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대는 종말을 기다리고 있다, 빠를수록 좋다, 그대가 자살하지 않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는 삶을 참아내는 것이다. 그대는 삶을 신이 그대에게 준 선물로서 즐기지를 못한다, 그대는 삶을 참아낼 뿐이다, 그대는 간신히 그것을 끌고다닐 뿐이다, 삶이라는 기차에서 내리게 되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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