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덕경 74 傷手

무위당 2011. 5. 23. 09:04

民不畏死 奈何以死懼之

若使民常畏死

而爲奇者 吾得執而殺之 孰敢

常有司殺者殺

夫代司殺者殺 是謂代大匠斲

夫代大匠斲者 希有不傷其手矣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찌 죽음으로써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백성들로 하여금 늘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어기는 자를 내가 잡아 죽일 때 이를 실제로 행하는 것은 누구인가?

언제나 죽이는 일을 맡은 자가 있어서 그 일을 한다.

명령자를 대신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은 큰 장인(匠人)을 대신해서 나무를 깎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대저, 큰 목수 밑에는 나무를 깎는 일꾼(조수)이 있는 법이니,

이런 일꾼이 대신 손을 다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懼  두려워할 구     奇  기이할 기     司  맡을 사     匠  장인 장     斲  깍을 착   

 

※ 이경숙 해설

‘위기자(爲奇者)’는 ‘기이한 짓을 하는 자’이니 지켜야 할 법이나 규범을 어기는 자라고 옮기면 될 것이다.

‘오득집이살지(吾得執而殺之) 숙감(孰敢)’, ‘내가 만약 그런 위치에 있어서(통치를 하는 입장에서) 죄지은 사람을 죽여야 할 때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은 누구냐’고 묻고 있다. 누구인지 다음 구절을 보자.


‘상유(常有)’는 ‘언제나 있다’라는 뜻이고, ‘사살자(司殺者)’는 ‘죽이는 일을 맡은 자’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집행자’ 또는 ‘하수인’이다. 권력자는 자기 손을 피로 물들이지 않는다. 언제나 피를 묻히는 것은 하수인이고, 불쌍한 똘만이들이고, 총알받이들이다. 이런 행동대, 집행인들은 언제나 있다. 구하기 어렵지 않으며, 흔하다라는 소리다. ‘대사살자(代司殺者)’의 뜻도 같다. ‘대신 맡아서 죽이는 자’이다. 이런 하수인들은 우두머리 기술자가 데리고 다니는 조수나 마찬가지여서 나무를 깎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을 하다가, 손을 다치게 된다는 말이다. 사람 죽이는 일을 맡아서 하는 졸개들, 하수인들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하는 연민의 소리다. 그 동기와 사유가 인의(仁義)나 충(忠), 정의(正義) 또는 삼지창을 찾으러 싸움터로 되돌아간 제나라 사람의 경우처럼 책임감이라던지 간에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은 짓은 누군가 대신해서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니, 이는 기술자 밑에서 위험한 일을 맡아 하다가 자기 손을 다치는 조수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정치가들 , 혁명가들. 세력가들은 언제나 혁명이니, 구국이니, 위민이니 하는 아름답고 거창한 명분으로 사람을 현혹하여 자기를 대신하여 사람 죽이는 일을 맡아줄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이런 일을 기꺼이 맡아서 할 사람은 언제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소모품이나 진배없는 총알받이들, 행동대원들, 하수인들이 없어서 정치나 혁명이 애로를 겪은 일은 없다. 격려나 충동에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하수인들이 넘치도록 많은 것이 인간 세상이다. 그리고 이런 총알받이들은 자기가 얼마나 초라하고 서글픈 싸구려 소모품으로 이용당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자랑스럽고 씩씩하게 죽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이런 불쌍한 인간을 양산해 내는 것이 인의(仁義)요, 정의(正義)요, 충성(忠誠)이라는 것을 노자는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인의, 정의, 충성 따위에 홀려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하지 말고, 누군가를 대신하여 남을 죽이는 짓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당부다. 어떤 시대, 어떤 나라에서도 흔하게 넘쳐나는 그런 하수인이 되는 그런 서글픈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그런 사람들, 그런 젊은이들이 너무나 넘쳐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들리는 노자의 말씀이다. ‘남의 하수인이 되어 손(목숨)을 다치지 말라’

 

“여씨춘추(呂氏春秋)”‘시군람(恃君覽)’편에 있는 이야기이다. 융이(戎夷)라는 제나라 선비가 제자와 함께 노나라로 길을 떠났는데, 성문이 닫힌 뒤에야 도착하는 바람에 성 밖에서 밤을 지새야만 했다. 몹시 추운 겨울이어서 둘 다 얼어 죽을 판이었다. 융이가 제자에게, “네가 내게 옷을 빌려주면 내가 살게 되고, 내가 네게 옷을 빌려주면 네가 살 수 있다. 나는 국사로서 천하를 위해 할 일이 많으므로 차마 죽을 수가 없구나, 너는 평범한 사람이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네 옷을 나에게 주려무나.”하였다. 그러자 제자는, “저같은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국사에게 옷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스승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융이는 한숨을 깊이 내어 쉬며, “아아! 그렇다면 국사로서 어찌 도의를 저버릴 수 있겠느냐?” 하고는 자기의 옷을 벗어 제자에게 주었다. 날이 밝기 전에 그는 얼어 죽었고, 제자는 살아 남았다. 이런 융이의 도의(道義)에 대해 공자나 맹자라면 칭찬을 하겠지만 아마도 노자라면 혀를 찰 것이다. 이는 본성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자(墨子)는 노자와 견해가 다르다. 그는 “묵자(墨子)”‘귀의(貴義)’편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세상에 정의보다 귀한 것은 없다. 사람들을 보고 ‘네게 갓과 신을 주는 대신 너의 손발을 끊으려고 하는데, 그래도 좋으냐?’고 물으면 좋다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갓과 신이 손발만큼 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네게 천하를 주는 대신 너를 죽이려 하는데, 생각이 어떠냐?’고 하면, 이 역시 듣지 않을 것이 뻔하다. 왜냐하면 천하의 귀한 것이 내 몸 귀한 것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마디 시비로 다투어 죽게 되는 것은, 정의가 내 몸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정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노자는 정의나 인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일과, 남을 대신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 따위는 본성에 반하는 우매한 짓이라고 본다. 그러나 묵자는 인의와 정의 때문에 천하와도 바꾸지 않는 목숨을 버리기도 하므로 정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노자의 편에 선다. 묵자는 사람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이유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정의가 그만큼 귀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분노나 명예심이 두려움보다 컸기 때문이며, 또한 대부분의 경우 자기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저질렀다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런 죽음들 중 많은 것이 정의로운 죽음, 애국적인 죽음, 진리를 위한 순교로 미화되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실로 솔직한 것은 노자다. 그리고 진정 어진 말씀은 노자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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