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者萬物之奧
善人之寶 不善人之所保
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於人
人之不善 何棄之有
故立天子 置三公
雖有拱璧以先駟馬 不如坐進此道
古之所以貴此道者何
不曰 求以得 有罪以免耶
故爲天下貴
도는 만물의 중심이니,
선인에게는 보배요, 불선인에게는 편안한 곳이 된다.
훌륭한 말은 떠들어댈 수 있고, 우러러볼 행동은 사람에게 보탤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람의 불선은 그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천자를 세우고 삼공을 둘 때에
경축하는 보물을 마차에 앞세우는 것이 앉은 채 이 도를 진전시키는 것만 못하다.
옛날부터 이 도를 귀하게 여겨온 까닭은 왜일까?
구하면 얻을 수 있고 죄가 있어도 면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천하에서 가장 귀한 것이 된다.
奧 깊을 오, 따뜻할 오 拱 두손맞잡을 공 璧 둥근옥 벽 駟 사마 사
耶 어조사 야, 간사할 사
※ 이경숙 해설
‘오(奧)’는 집의 서남쪽 어두운 방에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는 장소를 뜻한다. 집안이나 마을 또는 나라의 중심지나 신성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나 사상은 그것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 즉 신도(信徒)나 죄짓지 않은 착한 사람에게는 축복이지만, 비신자(非信者)이거나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저주이고 재앙에 다름 아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일부 기독교인들이 부르짖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기독교의 교리가 복음이고, 천국의 보증인지는 모르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에 가야한다는 끔찍한 소리요 저주일 뿐이다. 불교의 인과응보, 자업자득의 원리도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선한 공덕을 쌓은 사람들에게는 푸근하고 든든한 원리가 되겠지만 악행을 많이 해온 사람에게는 역시 두렵고 캥기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노자가 말하는 도(道)는 그런 것이 아니다. 착하고 훌륭한 사람에게는 보배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편안한 곳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적 가르침 중에, 노자가 말하는 이 도(道)와 같이 만인에게 똑 같이 복된 개념이 있는 것은 없다. 악인이라 하여도 도(道)가 그에게 징벌을 가하여 재앙을 내리는 일은 없다. 모든 죄지은 사람, 선하지 못한 사람, 악인도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이 도(道)라고 노자는 말한다. 제79장에는 ‘천도(天道) 상여선인(常與善人)’, 즉 ‘하늘의 도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런 도의 차원에서 보면, 믿는 자에게는 복을 주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벌을 주고, 착한 자는 천국에 보내고, 나쁜 인간은 지옥에 보내고, 자신을 경배하는 자는 사랑하고, 경배와 찬송을 거부하면 미워하고 저주를 퍼붓는 신이나 하늘의 개념은 너무 우습고, 초라하고, 치사하며, 쩨쩨한 것같다.
‘시(市)’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나 저자를 뜻하는 거리다. 그래서 ‘가이시(可以市)’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저자거리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댈 수 있다’ 일 수도 있고,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다’ 일 수도 있고, ‘시장에서 사 올 수 있다’라고 하여도 시비 걸기는 곤란하다. 아무튼 ‘좋은 말, 훌륭한 말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무엇’이다.
‘가이가어인(可以加於人)’은 ‘사람에게 보태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로서, 조금 의역하면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다’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모범을 보이고 본이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한 행동을 흉내 내게 하여 남에게 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人之不善 何棄之有, 사람의 ‘불선(不善), 달리 말하면 ‘부족한 점, 못난 면, 악한 성정 등은 그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어디에) 버릴 수 있겠는가?’하는 물음이다. 이 구절은 강한 부정의 의문문이다. 즉 ‘그것은 버릴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누구를 주어도 받지 않을 것이고, 시장에 가져가도 아무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불선(不善)’은 버릴 곳도 없고 줄 사람도 없는 것이다.
삼공(三公) : 주나라의 가장 높은 벼슬인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를 일컫는 말.
공벽(拱璧) : 큰 벼슬에 임명된 사람이 타고 가는 마차 앞에 내세우는 구슬
사(駟) : 한 수레에 매는 네 마리의 말
천자를 세우고 삼공을 두는 것은 다 천하를 안정시키고 나라를 위하고자 하는 일인데, 이런 목적이라면 이런 사람들이 행차할 때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의 앞에 공벽을 높이 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앉아서 도를 수행하여 진전시키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것이다. 천자나 황후장상이 모두 도를 닦고 수행에 발전을 보여야 한다는 노자의 바람이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온다.
‘불왈(不曰)’은 ‘말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말하지 않았느냐?’로 해석되는 강조의문문이다. 노자 당대에는 물음표나 감탄부호 등이 없어 의문형 문장을 구분하기 애매할 때가 많다. 서술문으로 읽어 뜻이 통하지 않는데 의문문으로 읽어 의미가 통한다면 그것은 의문문이다.
천자와 삼공이 아무리 권세로 천하를 다스려도 사람들의 불선(不善)함을 다 교화하고 그것을 버리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직 도(道)만이 구하면 얻을 수 있고, 설령 불선하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벗게 해줄 수 있기 때문에 도가 천하에서 귀한 것이라고 노자는 설명한다. 즉 천자나 삼공도 할 수 없는 일을 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불선(不善)에 대한 해결이다. 도는 선을 모시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불선을 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실로 귀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불선(不善)을 도가 아니라면 어디에 버릴 것이며, 도가 아니면 누구에게 그것을 주겠는가? 오직 도만이 우리의 불선을 받아 주고 우리의 짐을 덜어주고 우리를 편하게 한다. 그래서 불선인도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도다. 노자의 이 말 한 마디에 도는 천하의 모든 종교, 모든 진리 중에 가장 귀하고 값지며 가장 높은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