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덕경 61 取國

무위당 2011. 4. 26. 09:13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 小國不過欲入事人

夫兩者各得所欲

大者宣爲下

 

兼  겸할 겸, 다할 겸     宣  베풀 선 

 

큰 나라는 하류이니, ‘천하지교’요, ‘천하지빈’이다.

빈(牝)은 언제나 고요함으로써 모(牡)를 이기고 고요함으로써 아래가 된다.

고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의 아래가 됨으로써 작은 나라를 취하고,

작은 나라 역시 큰 나라의 아래에 듦으로써 큰 나라를 취한다.

그러므로, 그 아래에 듦으로써 취하기도 하고, 아래가 되는 것을 택하기도 한다.

큰 나라는 보다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려는 욕심이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려고 하는 것이니,

대저 양자는 각기 원하는 바가 다르다.

그러므로 큰 나라가 아래로 들어가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 이경숙 해설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다는 대단히 절묘한 비유다. 강은 하류로 갈 수록 강폭이 넓어지고 수량이 많아지고 유역이 넓어진다. 그 이유는 무수히 많은 작은 지류가 상류와 중류에서 모여들어 합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강의 하류를 빗대어, ‘큰 나라는 천하가 만나는 곳이요, 천하의 계곡’이라고 말한다. 물론 상류보다 아래에서 흐르는 것이 하류지만, 낮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모으고 합하여 흐를 수 있는 것이다.

 

빈(牝)’은 ‘계곡’ 혹은 ‘암컷’을 의미하며, ‘모(牡)’는 그 반대말로 ‘수컷’ 또는 ‘열쇠’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빈’은 ‘모’와 같이 사용됨으로써 ‘계곡’이 아니라 ‘암컷’ 또는 ‘여성성(女性性)’의 상징으로 쓰인 것 같다. 음양론(陰陽論)에 의하면, ‘음(陰)’은 조용하고, 고정적이며, 아래이고, 차가우며, 형상으로는 우묵하게 들어간 것이고, 질감으로는 매끄럽고, 물성(物性)은 무르고 부드러운 것을 말하며, 대표되는 상징은 물이며, 이와 같은 음적인 특성을 모두 지닌 것이 여성이다. 반면에 ‘양(陽)’은 시끄럽고, 유동적이며, 위이고, 뜨거우며, 형상으로는 불룩하게 솟은 것이고, 질감으로는 거칠고, 물성은 단단한 것을 의미하며, 대표되는 상징은 불이며, 이와 같은 양기의 총화는 남성이다. 그런데 음양론에서 이 양자의 조화를 말하면서도 그 우열을 논할 때는 언제나 ‘음’이 우세한 것으로 보았다. 시끄러움은 결코 조용함을 이기지 못하고, 뜨거운 것은 차가운 것을 이기지 못하며, 위는 아래를 범하지 못하며, 단단한 것은 무른 것을 이기지 못하고, 강한 것은 부드러운 것을 이길 수 없고,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한다고 보았다. 즉 음은 항구적이고, 양은 일시적이고, 음은 본질이고, 양은 현상으로 본 것이다. 노자의 사상은 그 근저에 이러한 음양론이 자리잡고 있어 여성적인 음의 세계를 이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짙다. 이상으로 여긴다기보다도 남성적인 양의 세계에 비하여 위태롭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아래(下)’라는 위치에 있어서의 우월성 역시 음으로서 여성성이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올라 갈수록, 그것이 높으면 높을수록 안정성은 저하되고 위태로움은 증가한다. ‘빈(牝)’이 고요함으로써 ‘모(牡)’에 이기듯이 또한 아래로써 위보다 더욱 안정되듯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상대의 아래에 들어가는 것이 상대를 취하는 길이라고 노자는 보고 있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취하기 위해 작은 나라의 아래에 들어간다는 말은 현대의 개념에서 몹시 어색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현대의 나라의 개념과 노자 당대의 나라의 개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라는 천자가 제후들에게 나누어준 땅이었다. 명확한 국경선도 없었고, 나라의 수도 약 2백여개에 달하였다. 주나라 왕실이 은을 멸한 후 공로자들 수백 명에게 조각조각 떼어서 나누어준 봉토들이 하나 하나의 나라 였다. 그 수백명의 제후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척간이거나 같은 왕실에 봉사하던 신하였다. 그리고 제후들 간에 등급과 서열이 분명하였다. 전쟁을 하는 경우가 있어도, 민족과 언어와 풍습과 역사가 각기 다른 이질적인 집단들의 충돌이 아니라 집안 싸움이었다. 물론 훗날의 전국시대에 이르면 전쟁의 양상도 험악해지고 잔인해졌지먄 노자 당대까지만 하여도 각 나라는 서로 안면이 있고 친한 사람들 간에 나누어 가진 땅들이었다. 영토가 작고 힘이 약하다 하여 마음대로 병탄하여 합하는 짓은 전국시대에 가서나 일반화 된 일이었다. 춘추시대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나라가 동맹관계로써 의지하고 돕던 시대였다. 그래서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취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위한다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취한다’는 말은 ‘서로를-동맹의 상대로-선택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 시대에는 탕왕(湯王)이 작은 갈(葛)나라를 섬긴 고사나 문왕이 곤이(昆夷)를 섬기던 일 등이 미덕으로 회자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였으므로 노자가 큰 나라가 작은 나라 아래에 들어가는 겸양을 보여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현대의 국제사회에 비추어 생각하면 영 이상하게 들리는 소리가 된다.

 

춘추시대의 나라라는 것 중에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의 마을에 지나지 않은 것도 많았다. 주 왕실의 눈치를 보고, 선조들 간의 관계를 살피고, 주변에 대한 염치와 체면을 생각하여 건드리지 않을 뿐이지, 만약에 큰 나라의 제후들이 무력으로 병탄하려고만 하면 아침 식사거리밖에 안 될 조그만 나라가 올망졸망하게 많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작은 나라들의 생존법은 큰 나라의 보호를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춘추시대부터 나라 간의 동맹이 활발했다. 동맹이라는 것은 한 대국을 중심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피보호국으로 줄을 서는 것이었다. 이 때 보호국인 대국이 맹주가 되어 작은 나라가 주변의 침입을 당하면 군대를 끌고 와 지켜주었다. 물론 소국은 그것에 대해 의리를 지키고 충성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작은 나라의 제후들이 원하는 것은 대국에 입사(入事)하여 봉공하는 것이었지 경쟁이나 대등한 외교관계의 수립 같은 것이 아니었다. 물론 큰 나라들의 욕심은 땅을 넓히고 사람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이렇듯 대국과 소국은 그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대국이 먼저 겸양하고 작은 나라의 아래에 들어가줌으로써 그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힘으로 누르고 윽박지르는 나라보다는 그렇게 덕을 베푸는 대국의 보호를 받고 싶은 것은 소국으로서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겸양으로써 소국을 대하는 것이 대국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훨씬 유리하고 쉬운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노자가 살던 무렵까지는 대국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작은 나라를 많이 거느리는 것이었지 결코 작은 나라를 무력으로 쳐서 없애버리고 큰 나라의 일부로 삼는 정복이나 병합은 아니었기 때문에 노자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 이후에 전국시대 사람들이 들으면 콧방귀도 안 뀔 소리다. 그만큼 노자는 아직까지 순박한 시대에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조차 너무나 강퍅하고 살벌하다고 몸서리를 친 노자였으므로 오(吳) 초(楚) 간의 잔혹한 전쟁을 목도하고는 세상을 버리고 말았는지 모른다. 노자가 본격적인 전국시대의 약육강식을 목격하였다면 할 말을 잊었을 것이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 생각하고 이 “도덕경” 5천 글자조차도 남길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한 환멸과 절망을 안고 떠나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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