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덕경 52 母子

무위당 2011. 4. 11. 09:33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復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謂習常

 

천하에 시작이 있음은 천하모(道)의 덕이다.

그 어머니(道)를 얻은 후에 되돌아가 그 아들(天下)을 알고,

아들을 안 후에 다시 돌아가 그 어머니를 지킨다면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다.

변화를 막고 문을 닫으면 한 몸이 다하도록 고달프지 않을 것이나,

변화에 몸을 열고 세상을 건너려고 하면 몸이 다하도록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고 하니,

빛으로써 명에 돌아가면 몸에 재앙이 미치지 않을 것이니,

이를 일러 상(常)을 익힌다고 한다.

 

兌  바꿀 태     殃  재앙 앙 

 

※ 이경숙 해설

'천하의 시작이 있었는데, 이것을 천하의 어머니라 한다’라고 번역하면 안된다. ‘시작=어머니’라니 말이 안된다.

‘이위천하모(以爲天下母)’는 ‘이것은 천하의 어머니가 한 짓이다’가 정확한 뜻이다. ‘천하가 시작되게끔 한 것은 천하를 낳은 어머니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천하를 낳은 어머니’, 이것이 바로 도(道)이다. 그러므로 천하는 당연히 도(道)의 아들이다. 즉 ‘도(道)는 천하의 어머니’요 ‘천하는 도(道)의 아들’이다.

 

‘기득기모(旣得其母) 부지기자(復知其子)...’에서 ‘기(旣)’는 ‘이미 기’다. 여기서는 ‘순서상의 앞’ 또는 ‘먼저’라는 의미로 읽으면 쉽다. 즉 이 구절은 ‘선득기모(先得其母) 후지기자(後知其子)’라고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먼저 그 어머니(道)를 얻고 그 후에 아들(天下)을 안다’는 문장이다. 여기서 선(先)과 후(後)가 아니라 ‘기(旣)’와 ‘부(復)’를 쓴 이유는 도와 천하 만물 사이에 순환하는 뉘앙스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어머니인 도와 아들인 천하는 단지 선후(先後)라는 순서의 개념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풀어서 말하면 ‘도를 얻은 후에 비로소 천하를 안다’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기지기자(旣知其子) 부수기모(復守其母) 몰신불태(沒身不殆)’라고 했다. 도를 얻고 천하를 알았다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냐? 그렇지 않다. ‘그 아들(天下)을 안 후에는(旣知其子), 다시 돌아가 그 어머니(道)를 지켜야 한다(復守其母)’고 노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 문장 천체를 좀 더 현대적인 문장으로 풀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먼저 도을 얻은 후에 천하를 알고, 천하를 안 후에 다시 돌아와 도를 지킨다면 능히 한 몸이 위태롭지 않으리니.’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 흡사하다. ‘깨달은 후에 그것을 지켜나간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復’은 두 가지로 발음 된다. ‘돌아오다’나 ‘뒤집는다’는 뜻일 때는 ‘복’으로 읽고, ‘다시’의 뜻일 때는 ‘부’로 읽는다. ‘부활(復活)’이라는 말이 대표적인 쓰임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자의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 즉 ‘다시 돌아간다’, ‘되돌아 간다’는 의미로 쓰였기 때문이다. 독음도 ‘돌아간다’는 것에 중점을 두면 ‘복’으로 읽어야 하고, ‘다시’ 또는 ‘재차’라는 뜻에 무게를 두면 ‘부’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좀더 일반적인 독음 ‘부’를 땨른다. 어느 독음과 자의를 택하든 큰 차이는 없다.

 

‘태(兌)’는 ‘바꿀 태, 변화할 태, 기쁠 태’ 등의 의미를 가지는데, 여기서는 ‘바꾼다’ 즉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색기태(塞其兌)’는 ‘변화를 좋아하지 말라’는 뜻이며, ‘변화를 거부하고 현상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이 말은 “도경”에 나온 ‘통나무 같은 사람’, ‘흐린 물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과 일맥상통한 말이다. 그리고 ‘폐기문(閉其門)’하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문을 닫으라는 것이다. 문을 열어 놓으면 바깥세상이 보이고, 바깥세상이 보이면 그 변화가 보이고,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게 되면 스스로도 변하고 싶은 충동과 조급함을 갖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문을 닫고 변화에 몸을 싣지 말라는 당부이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 ‘종신불근(終身不勤)’, 즉 ‘한 몸이 다하도록 고달프지 않을 것이다.’

‘근(勤)’은 ‘부지런할 근, 근면할 근’이다. 이 근면함은 모든 철학, 사상 유파들이 다 미덕으로 권유하고 그것의 고양에 힘쓰는 바이지만 유독 노자만큼은 우리에게 ‘근면하지 마라, 부지런하지 마라, 열심히 일하지 마라’고 타이른다. 그래서 노자는 줄곧 ‘천지 역시 불근하다(用之不勤)’고 말해온 것이다. 노자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정도의 양식과 필수 불가결한 소박하고 질박한 일용품의 획득에 필요한 이상의 노동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재화를 가지려고 하는 욕망과 근면함, 노력 때문에 세상에는 빈부의 격차와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계급의 질서와 현자(賢者)와 비현자(非賢者)라는 우열의 비교가 생기고, 이것으로 인해 세상이 불행해진다고 보는 사람이다. 때문에 노자는 문을 닫고 변화에 무심하라고 말한다. 그래야만 불필요하고 쓸데없이 부지런하게 수고해야 하는 고역스러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견소왈명(見小曰明)’에서 ‘작은 것(小)’은 주변의 사소하고 개인적인 잡사들이다.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변화를 막아버리면 그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당연히 극히 일상적이고, 주변의 사소하고 개인적인 잡사들이다.

‘수유왈강(守柔曰强)’에서 ‘유(柔)’는 ‘부드럽고, 순하다’는 뜻이다. 노자는 이 부드럽고 순함을 간직하는 것이 진실로 강하다고 주장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은 맞서지 않고, 투쟁하지 않으며, 부딪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한 것은 상대적이라,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그것보다 더 강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드러움은 맞서지 않으므로 강하고 약함이 없다. 싸우지 않으므로 이기고 지는 것이 없으며, 그 어떤 상대도 그것보다 더 강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 무엇도 그보다 더 강할 수 없으므로 부드러움이야 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강한 것이다. 

 

앞 구절에서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명이라(見小曰明)’하고, 이 구절에서는 ‘빛을 사용하여 명으로 돌아가라(用其光 復歸其明)’고 말하고 있다. 여기의 빛은 ‘작은 것을 보는 데 필요한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빛으로써 명(明)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견소왈명(見小曰明)’에서 ‘작은 것(小)’은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변화를 막아버리면 그 상태에서 눈에 보이게 되는 극히 일상적이고, 주변의 사소하고 개인적인 잡사들이다. 이런 작은 일들이나 보는 것이 ‘견소(見小)’이고, 이것이 즉 ‘명(明)’이다. 그리고 그러한 ‘명’으로 돌아가는 데 빛을 쓰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말하는 빛은 모든 문을 닫아건 집 안을 밝히는 빛이고, 사소한 주변 일을 살피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세상의 변화에 눈을 감고, 집의 문을 닫아걸고, 마음을 오로지 자기 한 몸과 주변일에나 쏟고 산다면 비로소 몸에 재앙이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無遺身殃)

 

‘이(바로 앞에서 설명한 것들)를 일러 상을 익힌다 하느니라(是謂習常)’ 여기서 ‘상(常)’이 무엇인고 하면 제16장을 참고하면 된다. “도경” 제16장에서 이르기를 '천하 만물이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정(靜)이라 하고, 이것을 일러 명(命)에 따른다 하고, 명(命)에 따르는 것을 일러 상(常)이라 한다’고 하였다(歸根曰靜 是爲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즉 ‘상(常)’이라는 것은 ‘천지자연의 스스로 그러한 법도(命)에 따르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영합하지 않고 작은 것이나 보면서 사는 생활이 ‘상(常)’이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는 '만약 변화에 문을 열고 세상사에 관여하게 되면 이 한 몸 다하도록 구원받기 힘들 것이니라’하는 말이다. ‘제(濟)’는 ‘건널 제’이므로 ‘제기사(濟其事)’는 ‘일을 건넌다’고 옮길 수 있는데, 이때 ‘사(事)’는 ‘세상사(世上事)’라고 읽으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건너가고자 하면’이라는 말인데, 의역을 하면 ‘세상일에 관여하고 살면’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老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덕경 54 以觀   (0) 2011.04.14
덕경 53 夷徑   (0) 2011.04.12
덕경 51 尊貴   (0) 2011.04.08
덕경 50 生死   (0) 2011.04.07
덕경 49 無常心   (0) 2011.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