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덕경 38 上德

무위당 2011. 3. 17. 08:31

上德不德是以有德

下德不失德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上仁爲之而無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則攘臂而扔之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忠信之薄而亂之首也

前識者道之華而愚之始也

是以大丈夫 處其厚不居其薄 處其實不居其華

故去彼取此

 

상덕은 덕이 아닌 것 같으나 덕이 있고,

하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니 이로써 덕이 없다.

상덕은 하는 것이 없고 일부러 하고자 하는 바도 없다.

하덕은 하는 일이 있고 굳이 하는 바가 있다.

상인은 일부러 하고자 하지 않지만 하는 바가 있고,

상의는 하는 일이 있고 굳이 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상례가 하는 일이란 (상대가) 응하지 않으면 팔을 거두어들여 물리친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에 덕이 있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 있고,

인을 잃은 후에 의가 있고 의를 잃은 후에 예가 있다.

대저 예라는 것은 진실된 믿음이 옅은 것이니 세상을 어지럽히는 으뜸이다.

이전의 일을 아는 것은 실속 없이 화려한 것이니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두터운 곳에 처하며 옅은 곳에 머물지 않으며,

실질에 처하고 겉만 화려한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덕을 취하고 허례를 좇지 않음이다.

 

攘  물리칠 양     臂  팔 비     扔  당길 잉

 

※ 이경숙 해설

‘상덕(上德)’은 ‘부덕(不德)’이라고 했다. 여기서 ‘부덕(不德)’은 ‘덕이 아니다’라고 읽으면 안 된다. 수 많은 의미가 ‘아니 불’ 한 글자에 함축되어 있다. 이 ‘불(不)’자 뒤에는 여러 글자를 붙일 수 있다.

부집(不執) : 덕을 붙잡고 있지 않는다. 덕에 집착하지 않는다.

불언(不言) : 덕을 말로 떠들지 않는다.

불선(不先) : 덕을 앞세우지 않는다.

불학(不學) : 덕을 배우거나 수행하지 않은다.

불로(不勞) : 덕을 행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불현(不現) :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노자는 '불실덕(不失德)’하므로 ‘하덕(下德)’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덕을 잃지 않은 상태 또는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상태를 ‘하(下)의 덕(德)’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무덕(無德)’하다고 하는 것이다. 진실되고 참된 덕은 스스로 덕을 벗어난 상태이다. 불교에서도 참된 깨달음은 깨달았다는 생각조차도 여윈 상태라고 말한다. 진실로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버렸다는 생각까지도 버린 사람인 것이다. 해탈의 순간에 해탈은 없다. 있다면 해탈의 의미 자체가 모순이 된다. 덕도 마찬가지다. 지극한 덕의 경지에 덕은 없다. 이것이 노자의 도와 덕이 유가의 덕목과 다른 점이다. 어찌 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쳐서 거부하거나 팔을 거두어들여 무시하는 차원일 수 있겠는가.

 

‘위지이유이위(爲之而有以爲)’는 ‘꾸미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꾸밈(爲)’이다. 즉 ‘하(下)의 덕(德)’은 마치 덕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하고, 덕을 가치로서 붙잡으려고 애쓰는 결과로 나타나는 덕이라는 것이다. 노자는 ‘의’를 이런 ‘하(下)의 덕(德)’과 마찬가지로 ‘의로우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애쓰는 결과로 갖게 되고 행하게 되는 덕목’으로 보기 때문에 가장 ‘상(上)의 의(義)’조차도 ‘하(下)의 덕(德)’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의로운 행위는 자신에게 손해되고 위험이 따른다. 때문에 의로운 행위는 그런 손해와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본성과 자연스러운 이기심을 억제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내면적인 갈등의 과정을 겪은 후에라야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성을 극하고 반하는 의지와 신념에 따르는 행동을 노자는 ‘위(爲)’라고 보는 것이다. 결국 마음을 꾸미고 본심을 왜곡하고 자애심을 억압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 행위에는 의도가 있다. 자신의 손해와 위험을 감수 하고서라도 의로운 행위를 하는 이면에는 반드시 심리적인 동기, 즉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수치심이거나, 칭송을 얻고자 하는 명예심이거나,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 받고 싶은 영웅심이거나, 후천적 교육에 의하여 주입된 가치관이거나, 불의한 행위에 대한 분노나 그에 대한 복수심이거나 간에 ‘의’에는 반드시 내재된 동기와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곧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이유이위(而有以爲)’이고 ‘위지(爲之)’는 그 결과로 드러난 모습이다. ‘하덕’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작위가 개입된 꾸며진 것으로 ‘의’와 같다.

 

반면에 ‘상인(上仁)’을 표현한 ‘위지이무이위(爲之而無以爲)’는 꾸미고자 하는 의도나 심리적 강제는 없으나 드러나는 행위가 있다는 말이다. 노자는 인(仁)-물론 상(上)의 인(仁)“에 국한해서지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있지만 자연스러운 행위도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비교하여 ‘상덕(上德)’은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하면 ‘무위이무이위(無爲而無以爲)’라고 했다. 이 말은 ‘자연스럽지 못한 의지의 작용이나 심리적 동기도 없으며, 또한 드러나는 바 행위도 없다.’는 것이다. 노자의 이런 덕관(德觀)에 기초한다면 ‘덕행(德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덕행으로 드러난 덕은 결코 상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선업(善業)도 업이다’는 말과 같다. 아무리 아름답고 고결한 선행도 역시 업(業)이어서 보답이 따른다. 그 보답이 비록 복일지라도 인연에 따른 응보(應報)이다. 즉 행이 있으면 뒤따르는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진실된 보살행은 응보가 없다. 보살행을 행하는 마음도 없고, 보살행을 행한 기억도 없고, 보살행을 행한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처의 대자대비다. 부처는 대자대비행의 결과로 스스로 받는 보상이나 복이 없다. 보(報)를 만드는 업(業)이 아닌 행위인 것이다. 노자는 ‘상덕(上德)을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보고 있다. ‘상덕(上德)은 무위이무이위(無爲而無以爲)’에서 ‘무위’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행(無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오히려 ‘상(上)의 덕(德)’이 일으키는 것은 부처의 대자대비행이나 보살행과 같이 지극한 행인 것이며, 그것에는 어떠한 인위적 동기나 목적 또는 숨겨진 의도가 없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없어 보이지 않는 ‘행무행(行無行)’이며 ‘위무위(爲無爲)’인 것이다. 

 

노자는 ‘예(禮)’를 유위(有爲)한 덕목의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예(禮)’에 대한 설명은 유일하게 문장이 길다. ‘위지이막지응즉양(爲之而莫之應則攘) 비이잉지(臂而扔之)’로, ‘예(禮)’에 의한 노자의 해학이 담긴 비꼼 때문에 다른 덕목의 두 배나 되는 길이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 드러난 행위가 꾸며진 작위이긴 마찬가지지만 ‘하덕, 상인, 상의’와 다른 점은 그것에 대한 응대가 없으면 팔을 당겨 (거두어들이면서) 물리쳐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이잉지(臂而扔之)’는 ‘매몰차게 팔을 거두어들인다’는 뜻이다. 손이나 팔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대화나 교류의 거부를 뜻한다. ‘예’에 대해서 ‘예’로 응대하지 않으면 곧 단절해버린다는 의미이다. 시중의 노자 해설서를 보면 ‘비이잉지’가 무슨 뜻인지 몰라 ‘팔을 휘둘러 대든다’는 식으로 풀고 있다. 그러나 ‘잉(扔)’은 ‘거두어들인다’는 뜻이다. ‘예자(禮者)’들은 어떤 경우에도 팔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품위없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 무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폭력이 아니라 대개 무시와 경멸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상대하지’ 않음이고, ‘팔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노자는 무례에 대한 ‘예자’들의 반응을 아주 짧은 한 마디로 잘 나타내고 있다. 군자연 하는 ‘예자’들의 오만과 위선을 비웃고 있다. 물론 이것은 ‘상례’일 때의 이야기다. ‘중례(中禮)’나 ‘하례(下禮)’의 수준이 되면 예를 앞세워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인’이나 ‘의’는 자기가 그리할지언정 상대에 대해 같은 정도의 ‘인’과 ‘의’를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데 비해 ‘예’는 남에게도 똑같은 ‘예’를 요구하기 때문에 아주 고약한 것이라고 노자는 보고 있다. ‘상례’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분노하는 것이 ‘예’라는 것이다. ‘무례한 놈, 예의도 모르는 오랑캐’ 등등, 이 ‘유자(儒者)’들은 상대를 폄하하는 것이 전매특허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동양의 역사 이래로 가장 많은 전쟁의 이유가 ‘예’였고, 가장 수많은 죄인을 만든 것도 ‘예’였으며, 가장 무거운 죄가 ‘예’를 모르는 죄였다. 예를 지키지 않으면 친구는 물론 이웃도 쳐다보지 않았고, 나라간의 수교와 통상조차 거부 하였다. 팔을 거두어 내치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도 불사했던것이다.

노자는 ‘예’라는 것이 내재적인 의도나 작위가 아니라 상대적이고 표면적이면서 노골적인 강요가 전제되고 있다는 점에서 유가의 덕목중 가장 무가치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스스로의 작위 만이 아니라 상대의 작위까지 강제하므로 노자의 ‘도’와 ‘덕’과는 어울리 수 없는 것이었다. 현자가 사람들에게 ‘현’을 요구하고, 인자가 모든 사람에게 ‘인’을 기대하고, 식자가 범인들에게 ‘박학’을 주입하려하고, 덕자가 중생한테 ‘덕’을 강제하고, 예자가 누구에게나 ‘예’를 강요한다면 바로 세상이 지옥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지옥이 있었던 때도 있었다. 오늘날에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 공산주의적 인간상을 요구하는 공산 국가가 바로 그러한 지옥이다. 부처가 자비를 베풀면서 사바 중생에게 똑같은 자비행을 강제한다면 그게 지옥의 모습이다. ‘예’는 노자가 통찰한 바와 같이 인간 사회에 참혹함을 불러온 바가 많았다. ‘인의예지신’ 중에 유독 ‘예’만이 수많은 비극을 불러왔다. ‘의’가 만든 참혹한 일들은 주인공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 행위의 결과이지만, ‘예’에 의한 비극은 다수의 대중에게 강제된 수동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피해들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제5장에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있다. ‘천지자연은 인자하고 인자하지 않고의 차원을 벗어나 있다’는 이야기다. 만물은 천지자연의 섭리 속에서 ‘화육생성’하는 것이니 어찌 천지자연이 인자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마는 천지가 인자하다 잔인하다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일 뿐, 천지는 인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다. ‘상덕’도 이와 같다. 부처는 결코 내가 부처니까 자비로워야 하겠다, 자비를 베풀어야겠다는 생각 따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을 자비행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대자대비란 사바 중생이 이름 붙여 하는 말일 뿐 부처와 관계가 없다. 부처는 자비심이라는 테두리의 밖에 있는 존재다. 하지만 부처가 하는 모든 일을 우리는 자비행이라 한다. 중생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와 덕에 대한 중요한 의미상의 차이를 볼 수가 있다. 노자는 제21장에서 ‘공덕지용(孔德之容) 유도시종(唯道是從)’이라 하여 도를 따라 드러나는 덕의 모습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주론으로서의 도론(道論)에서도 도(道)는 유(有) 이전의 무(無)이고, 실(實)이 생기기 전의 허(虛)이다. 설명이나 묘사가 불가능한 우주 만물의 모태이다. 이에 비해 생활철학으로서의 도론(道論)에서 도는 진실된 성인의 경지이다. 불교와 비교하면 바로 해탈한 부처의 경지라고 볼 수도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부처의 행은 행이 아니다. 모든 인연법의 사슬에서 풀려난 해탈자의 행은 선업이든 악업이든 인연과는 일체의 관계가 없다. 부처의 대자대비는 부처 자신에게 어떤 보상도 과실도 돌아오지 않는다. 부처가 선행을 하여 극락왕생을 하거나 왕후장상으로 태어나는 복을 받는다면 이건 코미디나 마찬가지다. 부처는 자비행으로 해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 존재이다. 어떤 상도 부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칭송이나 숭배도 그것을 더 아름답게 하지 못하고, 어떤 비난과 욕설도 그것에 한 점의 얼룩도 만들 수 없다.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난 경지의 행이 부처의 자비행이다. 이런 경지와 차원에는 상중하의 구분은 없다. 부처의 구분에 상부처, 중부처, 하부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에도 상도(上道), 중도(中道), 하도(下道)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도는 하나요 차원이 없다. 도는 무형(無形)이고, 허상(虛像)이고 비물(非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래의 덕은 유형(有形)이며, 실상(實像)이고, 진물(眞物)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원의 구분이 가능해진다.

 

‘도경’이 우주 자연의 섭리, 부처의 길, 성인의 본질을 논한 것이라면, ‘덕경’은 인간 사회의 실천 윤리, 생활 덕목, 보살의 행을 설명하고 있다. 노자의 도덕관에서 덕은 도를 따라 나오는 것이며, 도가 물(物) 이전을 말하는 것인 데 비해 덕은 도에서 비롯되어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물(物)의 법칙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 사회의 덕목으로, 정치 윤리로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물화(物化)된 세계는 그 이전의 모태와는 다른 스스로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듯 인간 사회의 윤리로서 적용되는 덕은 도와는 다른 모습일 수 밖에 없다. 부처의 해탈이 그러하듯 도라는 것도 인간 사회에 곧바로 적용하기에는 너무 지고한 하늘의 법칙이어서 노자는 덕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를 잃은 후에 덕이 있게 되었다.’

노자는 덕조차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인’과 ‘의’와 ‘예’가 숭상되는 세상을 못마땅하게 여긴듯하다. ‘의’에 대해서는 ‘도경’에서 여러 번 말한 적이 있었다.

 

‘전식(前識)’은 노자가 지어낸 고유어이다. 이 장에서 말하고 있는 주제인 ‘예(禮)’의 다른 표현이다. ‘전식(前識)’은 앞서 있었던 일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이 바로 ‘예(禮)’이다. 달리 말하면 ‘옛사람이 행하였던 바’가 바로 ‘예(禮)’인 것이다. ‘옛사람이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아는 지식’이 바로 ‘전식(前識)’이다.

‘예’라는 것은 선왕(先王), 선인(先人), 즉 옛사람이 생활의 규범으로 확립시키고 행했던 것을 배우고 알아서 오늘에 그대로 살려 행하는 것이다.[“예기(禮記)”의 ‘예운(禮運)’편, “논어(論語)”의 “위정(爲政)”편 참조] “중용(中庸)”에서는 ‘예의(禮儀)가 3백이요, 위의(威儀)가 3천’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만큼 예로 규정된 행위의 종류가 많고 다양했다는 것이다. 제례, 장례는 물론이고 방문과 접대, 거래와 대화, 결혼, 회맹(會盟)등 모든 일상 생활의 법도가 예로써 규제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행위가 예에 들어 맞는 것인지, 예에 벗어나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옛사람이 어떻게 했는가’였다. 그래서 공자는 생전에 옛 은나라의 예법을 그토록 할려고 천하를 주유하다시피 하였고, 은나라의 예를 알고 있는 사람이면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였던 것이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물은 것도 예에 대해서였다.

예의(禮儀) 제도는 전승되고 계승되는 것이지만 시대에 따라 더해지기도 하고 덜어지기도 하여 늘 변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예’는 본질적으로 앞 시대의 것에 따르는 것이며, 선인이 했던 바를 살펴 모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예’를 ‘앞서 있었던 지식’이라 하여 ‘전식’이라 했던 것이다.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송나라에 공녀로 가 송나라의 공비(公妃)가 된 여자가 있었는데, 궁궐에 화재가 났을 때 불타 죽고 말았다. 노나라의 예에 따르면 귀부인은 밤에 집 밖을 나갈 때는 반드시 시중드는 여관(女官)을 동반해야 했는데, 불이 났을 때 여관(女官)이 아무도 없어 도망치지 못하고 그대로 불타 죽고 만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노자는 이런 ‘예’에 대한 지식, 즉 ‘전식’을 박학다식의 화려함이 있을 뿐 아무런 실이 없는 겉치레로서의 헛지식으로 보았다. 예로부터 전해져 온 수 많은 예법을 훤히 알고 실천하여도 그런 지식은 사실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고, 타당성과 합리성을 따지게 되면 근거가 허약한 것들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맹자(孟子)”에서처럼 ‘예의에 얽매이면 굶주려 죽게 되고, 예의를 따른다면 아내를 맞이할 수 없게 된다 해도 반드시 예를 지켜야 하는가?’하는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이 나오게 된다.

노자가 ‘지(智)’ 대신 ‘식(識)’이란 말을 쓴 이유는 예법이라는 한정된 의미의 지식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인’이나 ‘의’는 학문적 공부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고, 꼭 공부에 의한 지식의 습득이 전제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예’는 공부 없이는 습득할 수 없는 것이다. ‘예’는 지혜의 영역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이다. 당대의 많은 공부 중에서 ‘예’만큼 어렵고 복잡한 공부는 없었다.

그러나 노자는 이전에 옛사람이 행한 바를 조사하여 익힌 ‘전식’을 박학하기만 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어리석음의 시작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장부라면 ‘예’와 같이 얕고 겉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실하고 두터움을 좇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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