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도경 28 大制

무위당 2011. 2. 25. 10:10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於無極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故大制不割

 

강한 줄 알면서도 약자의 입장을 지키면 천하의 시내가 된다.

천하의 시내가 되면 늘 덕이 떠나지 않아서 어린아이로 돌아 간다.

결백하여 깨끗함을 알면서도 허물과 오명을 감수하는 것은 천하의 법도를 행하는 것이 된다.

천하의 법도를 행하면, 어떤 경우에도 덕이 의심스럽지 않아서 무극(無極)으로 돌아간다.

영화를 알면서도 욕(辱)됨을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를 이룬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늘 덕(德)이 족하여 다듬지 않은 통나무로 돌아간다.

다듬지 않은 통나무가 쪼개어지면 그릇이 되니, 성인이 이를 쓴다면 족히 관리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

고로, 큰 법도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忒  변할 특, 의심할 특     樸  통나무 박, 질박할 박 (撲  두드릴 박)     制  억제할 제, 법도 제

 

※ 이경숙 해설

강하다 하여 교만하지 않고, 약하다 하여 비굴하지 않으며 강자에 당당하고 약자에 겸손한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천하계(天下谿)이다. 천하의 냇물처럼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흘러들어 주위에 모이는 것이다.

이것이 늘 덕이 떠나지않는 상태이며, 참된 인망(人望)이다.

   백(白)’과 ‘흑(黑)’도 ‘흰 것’과 ‘검은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백(白)은 결백하여 잘못이 없는 것이고, 흑(黑)은 비리나 부정이 있는 것을 상징하는 글자다. 비록 자신이 깨끗하고 결백하여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허물과 오점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이 ‘지기백(知其白)이지만 수기흑(守其黑)하는 것’이다. 깨끗함을 알지만 기꺼이 더러움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 밝음을 알지만 어두움 속에 서는 것이 바로 ‘천하식(天下式)’이다. 천하가 그러한 법식을 행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하늘과 땅이 스스로 결백함을 드러내어 주장하지 않아도 그 허물이 없듯이 백을 알면서도 흑의 입장을 감수하는 것은 덕이 결코 의심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증명하여 결백함이 밝혀진 사람보다도 스스로 허물을 뒤집어썼지만 세상이 그의 결백을 알게 되는 경우에 그 덕은 더욱 빛나는 것이며, 그런 결백이라야 한 점의 의혹이나 의심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상덕불특(上德不忒)’이다. 이런 사람은 단지 결백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극(無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오해를 푸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덕이 의심스럽지 않은 상태인 지극한 자리에 이른다는 말이다.

   천하의 인재를 모으고 흐르게 할 계곡과 같은 사람을 노자는 ‘영화(榮華)를 알면서도 욕(辱)된 삶을 지키는 자’라고 말한다. [※ 진나라의 초석을 닦은 백리해(百里奚)의 일화]

힘을 가진 자가 그 힘을 사용하지 않을 때 힘은 더욱 가치로운 것이며(知其雄 守其雌),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자가 그것을 사양할 때 영예는 더욱 빛나는 것이다(知其榮 守其辱).

   세상에는 웅(雄)을 알면서 자(雌)를 지키고, 백(白)을 알면서 훅(黑)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유하고 여성적인 사람인데, 그 속에는 실로 남성적인 용기와 담대함, 힘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검은 듯이 보이지만 그 속은 실로 흰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비루하고 천하게 보이지만 실로 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영아(嬰兒)와 같고 무극(無極)에 통해 있는 사람이며, 통나무와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런 통나무를 다듬어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만약에 성인이 이런 사람을 쓴다면 곧 관리의 우두머리가 될 사람이라는 것이다.

   ‘대제(大制)는 불할(不割)’이라는 말은 천하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법도는 자웅(雌雄), 백흑(白黑), 영욕(榮辱), 상하(上下), 귀천(貴賤), 선악(善惡)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큰 인물, 큰 그릇은 그런 식으로 어떤 하나의 틀에 집어 넣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진실로 강한 사람은 약해 보이고, 진실로 대담한 사람은 비겁해 보이며, 진정 결백한 사람은 흑막이 있어 보이고, 진정 선한 사람은 악하게 보인다. 또한 진정 의로운 사람은 불의하게 보이며, 정말로 영화를 누릴 사람도 비천하게 보이는 수가 많다. 그래서 노자는 ‘대제(大制)는 불할(不割)’이니 한 쪽 면만으로 사람을 평가하여 구하거나 버려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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