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도경 14 道紀

무위당 2011. 1. 24. 09:15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보이지도 않는 것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니 이름하여 희(希)라 하고,

얻지 않고도 잡은 듯이 알 수 있음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 셋은 이치로서 따질 수 없는 경지를 말한 것이니, 섞고 합하여 하나로써만 여길 수 있다.

그것은 위로는 밝지 않고, 아래로는 어둡지 않다.

그 경지는 복잡하고 미묘하여 이름을 붙일 수 없으며, 

물체가 없는 자리로 돌아간 경지이다. (물체로서의 내가 사라진 경지)

이를 일러 모습이 없는 모습이라 하고, 물체가 없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를 말하여 홀황(恍惚)하다고 한다.

(이로써 나는) 보이지 않는 도의 머리를 맞이하였고, 

보이지 않는 도의 꼬리를 따라가 옛 도를 잡아 오늘을 있는 것으로 거느리니,

(내가) 능히 옛 시작을 안 것이라 할지니, 이것을 일러 ‘도의 기원’이라 한다.

 

搏  잡을 박, 칠 박     皦  옥빛 교     昧  새벽 매     繩  줄 승 (繩繩 : 꼬이고 또 꼬이고)

    

※ 이경숙 해설

‘명왈이(名曰夷)’에서 그 주어는 ‘보이지 않는 것(不見)’이 아니라, ‘보는 것(視)’이다. 즉 ‘보이지도 않는 것을 보는 것’, 이것을 일컬어 이(夷)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 다음의 두 문장도 마찬가지다.

 

앞서 노자는 ‘도’라는 것이 ‘화기광’이요 ‘동기진’ 같은 것이어서 그 실체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노자는 ‘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노자는 어떻게 ‘도’라는 그 무엇을 알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 14장이다. 노자가 어떻게 ‘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들리지도 않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잡지 않고도 만져볼 수 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것은 동양철학의 직관에 의한 통찰력을 말하고 있다. 불교의 선(禪)에서 말하는 ‘불립문자 직지인심(不立文字 直旨人心)’과 같은 말이다.

 

此三者不可致詰 

‘이 세가지는 이치로서 따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즉 ‘보이지도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도 않는 것을 듣고, 잡지 않고도 만져 아는 것’을 따지고 들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달마도 언외(言外)의 선(禪)을 말하였고, 석가모니도 이심전심(以心傳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경지의 도(道)를 알았다는 뜻이다.

‘고혼이위일(故混而爲一)’, 그러므로 (이 세가지는) 서로 섞여서 하나이다. 즉 셋을 분리하여 각각 설명할 수 없고 전체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여기서 그것(其)은 위의 세가지(夷, 希, 微)를 하나로 하여 말한 것이다.

위로는 밝지 않고, 아래로는 어둡지 않다. 즉 ‘밝다’, ‘어둡다’ 말할 수 없는 무엇이다.

'승승(繩繩)’은 ‘꼬이고 또 꼬이고’라는 의미가 강하다. 워낙 오묘하게 얽히고 꼬여서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했다.

‘무물(無物)’은 ‘색(色)의 세계’가 아닌 ‘공(空)의 세계’를 말함이다. 즉 ‘물체로서의 내가 사라진 경지’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런 경지에서 가질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이(夷), 희(希), 미(微)’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선의 경지이며, 노자는 자기가 바로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이어서 ‘도를 깨쳐 알게 되었노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다음에 나오는 ‘홀황’의 경지를 표현한 말로 볼 수 있다. ‘홀황’이란 도를 묘사한 말이 아니라, 도를 알 수 있는 마음의 경지를 뜻하는 말이다. 때문에 ‘무상지상’의 ‘상’이나 ‘무물지상’도 도의 묘사가 아니라 그러한 경지에 이른 깨달음의 상태를 묘사한 말이다.

 

是謂惚恍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과 같은 말이다. 사리자가 ‘어떻게 하면 반야바라밀다(최상승의 깨달음)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는 말에 관자재보살이 대답한 내용이다. ‘오온(인간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원소 / 色, 受, 想, 行, 識)이 모두 공(空)임을 보면 일체의 고액(苦厄)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대답이다. 여기서 ‘오온개공’이 바로 ‘무상지상’이며 ‘무물지상’이다.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느껴서 아는’ 그러한 경지 이다. 그것이 바로 ‘홀황’이다, 그래서 도는 이, 희, 미 세 가지가 하나로 혼일된 경지에서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는 것이다.

 

※ 오온(五蘊)

객관사물에 대한 인식의 주체는 인간 자신이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은 어떠한 모습으로 있나 살펴보고자 한 것이 불교의 오온설이다. 때로는 오온을 오음(五陰)이라고도 한다. 경전에 ‘중생의 몸’을 오음이라 하기도 하고, ‘오음에 매달려 결박 당하고 있는 것’을 중생이라 한다. 일체 모든 중생은 물질적인 것(色)으로부터 사물을 보고 인식하고 분별하는 작용(識)에까지 집착한다. 물질에 집착하므로 탐욕심을 일으키고, 탐욕심 때문에 물질에 구속당하게 된다. 나아가 인식하고 분별하는 마음에까지 구속당하게 된다. 이러한 구속 때문에 생노병사와 근심걱정과 모든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집착하는 것을 범부라고 한다.’고 하였으며, 논서에는 ‘번뇌란 집착을 이름한다.’[구사론]고 했다. 위에서 말한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사물을 보고 인식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오온이라 한다.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다. 중생세간은 이 다섯 가지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오온설은 인식의 주체가 변하지 않는 실체(實體)라고 집착하는 데서 중생의 고통이 비롯되는 것이므로 오온의 실상이 무상한 것임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만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受想行識)도 무상한 것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육신에 집착할 뿐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관념에까지 불변의 것이라고 집착하고 매달리는 데에서 우리들이 고통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주관이 있을 때 객관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주관인 오온이 무상한 것이라면 주관의 그림자인 객관세계도 무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식의 주체인 중생은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로 되어 있고, 이 두 가지 요소는 모두가 쉴새없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의 주체와 그 주체가 인식하고 있는 그 자체도 변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집착심 때문에 변하고 있는 자기 자신과 자신에 의하여 인식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자기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잡히지 않은 것을 잡는’ 그러한 경지 ‘홀황’의 경지에서, 보이지도 않는 도의 머리를 맞이하고 보이지도 않는 도의 꼬리를 따라가 옛도를 붙잡아 오늘을 다스리는 것으로 있게 하였다. 바로 노자 자신이 이 일을 해내었노라는 선언이자 만천하에 대한 공표이다.

 

能知古始 是謂道紀

그리하여 노자 자신이 ‘능히 옛 시작을 알았으니, 이것이 바로 도의 기원이다’라는 엄청난 선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14장의 주인공은 바로 노자 자신이며, 노자 자신이야말로 도의 발견자요, 그것의 시발점이라고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며, 노자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지만, 이 말의 주인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어, ‘후기신’하며 ‘생이불유’하는 성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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