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도경 16 不殆

무위당 2011. 1. 26. 10:05

致虛極 守靜篤

萬物並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爲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허를 극에 이르게 하고 맑고 고요함을 도탑게 하여

나는 만물이 더불어 생겼다가 돌아감을 본다.

만물이 제 모습을 다투어 뽐내지만 각기 자기의 근본 자리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만물이 근본 자리로 돌아감을 일컬어 정(靜)이라 하고, 그것을 일러 명(命)에 돌아간다고 한다.

명(命)에 돌아감을 일컬어 상(常)이라 하니, 상(常)을 아는 것을 가리켜 명(明)이라 한다.

이 상(常)을 모르면 망령된 짓을 하여 흉한 일을 당하니,

상(常)을 알면 능히 위태롭지 않느니, (위태롭지 않기로는) 제후와 장상이요, 제후장상보다는 왕일 것이고, 왕보다도 오히려 하늘이요, 하늘 보다는 도(道)요, 도(道)보다는 구(久)이니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篤  도타울 독     芸芸 : 사물이 썩 많은 모양

   

※ 이경숙 해설

문장은 도치되어 있는 문장이다. ‘치허극(致虛極) 수정독(守靜篤) 만물병작(萬物並作) 오이관복(吾以觀復)’을 ‘치허극(致虛極)하면 만물병작(萬物並作)이요 수정독(守靜篤)하면 오이관복(吾以觀復)이니라’로 읽어야 한다.

‘복명(復命)에 돌아갈 수 있다’에서 복명(復命)이 무엇인지 그 다음에 설명하고 있다.

 

만물은 각기 제모습을 드러내어 존재하기도 하지만 결국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데, 그렇게 돌아 가는 것이 ‘정(靜)’이며, 그것을 가리켜 ‘복명(復命)’이라 한다.

이 세계는 유한하며 그 어느 것도 영구 불변의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즉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중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같은 말이다.


‘만물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을 상(常)이라 한다, 상(常)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고 한다.’ ‘상(常)’, ‘명(明)’ 등은 노자가 이름붙인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에다 갖다 붙인 이름을 억지로 ‘항상하다’, ‘밝다’ 등으로 번역하면 안된다. ‘어떤 존재도 명을 다하면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는 뜻만 새겨들으면 된다.

 

不知常 妄作凶

‘상(常)을 모르면 망쪼가 든다.’ 이 말을 앞서 상(常)이란 이름을 안 붙여 놓았으면 이 문장은 엄청 길어진다. 앞에 했던 말을 주욱 나열해 놓고 ‘그런 이치를 모르면 망쪼가 들어 흉한 꼴을 보느니라’하고 글이 엄청 길어진다. 그런데 ‘상(常)’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으니 간단하게 부지상(不知常)하고 석 자로 문장이 끝나 버렸다.

 

그러므로 도를 알고 지켜 고요함을 두텁게 간직하여 만물이 결국 자기의 난 곳으로 돌아감을 보고 망령되고 허망한 일을 삼가면, 몸이 없어지는 순간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知常容

바로 앞의 문장에서 ‘상(常)을 모르면 망령된 짓을 하여 흉한 일을 당한다’고 하였으니, 상을 알면 그 반대인 것은 틀림없다. ‘망령된 짓을 하여 흉한 일을 당하는’ 그 반대는 당연히 ‘망령된 짓을 하지 않아 험한 꼴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용(知常容)의 용(容)은 ‘망령된 짓을 하지 않아 험한 꼴을 보지 않는 것’이다.

 

※ 三法印 (四法印)

諸行無常 :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덧없다

諸法無我 : 일체 모든 존재는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一切皆苦 :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통이다

(涅槃寂靜 : 열반은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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