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덕경 70 知己

무위당 2011. 5. 13. 08:39

吾言甚易知甚易行

天下莫能知莫能行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知我者希 則我者貴

是以聖人 被褐懷玉

 

나의 말은 매우 알아듣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운데도,

천하가 이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잘 행하지도 못한다.

말에는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이 있고, 일에는 (그 일을 하는) 주체가 있는 법이다.

대저 오로지 무지(無知)하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를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를 아는 자는 드물고, 자기를 본받는 자도 귀한지라,

                         (나의 해석 : 나를 깨달은 자도 귀하다)

그러므로 성인은 허름한 옷을 입어도 가슴에는 구슬을 품고 있다.

 

 褐  털옷 갈 (渴 목마를 갈)     懷  품을 회

 

※ 이경숙 해설

노자 당시에도 사람들은 노자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던 같다. 그 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노자의 도(道)가 너무 크고 그 뜻이 너무 높아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노자의 말을 똑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글을 주의 깊게 읽지 않아서이고, 성현의 말씀을 대할 때 진지하지 않아서이고, 고매한 사상을 논함에 너무 경박해서이다. 이는 실로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노자의 말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것을 남에게 가르치고 책으로 펴낸 사람들 조차도 노자의 말을 실천하고, 생활로써 보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나도 감히 도를 실천하며 산다는 말은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늘 노자의 가르침을 새기며 살아 왔다. 이런 책을 쓰는 것조차 그토록 망설이고 미적거린 이유가 그래서이다. 아마도 노자의 말이 절반만이라도 제대로 전하여지고 있었다면 내가 이런 책을 펴내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말에는 근원이 있고, 일에는 통솔자가 있거늘, 오직 (그런 이치를) 알지 못하므로 내가 아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식으로 번역 되어져 왔는데, 아주 잘못 된 것이다. 지금까지 노자는 입만 열면 ‘무지(無知)’하라고 말해 왔는데, 갑자기 이 장에서 ‘무지’하기 때문에 자기를 알지 못하다고 ‘무지’ 탓하고 있는 것으로 된다면 도저히 말이 안되는, 터무니 없는 번역이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런 터무니없는 해석들이 2천5백 년 동안 수정되어지지 않고 전해져 올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할 뿐만 아니라 동양학과 고전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의 나태함과 안일함 그리고 후안무치를 용서할 수가 없다.

'모든 말에는 종(宗)이 있다’는 말은 어떤 말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유포되고 전해지든지 간에 최초로 그 말을 한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그 일의 주체(관련자, 주관자, 당사자)가 있다는 말도 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지식도 마찬가지로 자기에 대해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왜 무지(無知)하여야 한다고 (노자가) 말을 하느냐 하면, 세상의 지식이라 하는 것들이 자기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역으로 이해하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아는 것은 필요하고도 소중한 일이므로 노자가 말하는 ‘무지하여야 하는 것’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이 다 무가치하고 번거로울 뿐이라 해도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큼은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강조하여 마지않는 것이 바로 ‘지기(知己)’이다. ‘내가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하는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불자의 수행이다. 그것에 대하여 진실된 답을 주는 것이 불교요, 그 대답이 바로 불법이다. 팔만의 대장경이 설명하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을 아는 방법’이다. 자기를 아는 공부가 가장 참된 공부이므로 노자는 ‘모든 말에는 그 말을 최초로 한 사람이 있고, 모든 일에는 주체가 있으니, 세상에 오직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너 자신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고 하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도덕경”에도 나오고 “불경”에도 나온다. 모든 학문, 종교, 철학, 사상의 정수가 바로 ‘자기에 대한 성찰’인 것이다.

 

‘갈(褐)’은 삼실로 짠 거친 옷이다. 때문에 그것을 입는다는 말은 남루하고 허름한 옷을 걸치고 산다는 뜻이다. 그런데 품속에는 귀하고 값이 비싼 구슬을 품고 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이겠는가? 몸에 걸친 남루한 삼베옷은 가난하다는 것의 비유이니 지적(知的)으로 빈곤함을 뜻한다. 즉 무지하여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성인은 이와 같이 세상의 지식에는 아는 것이 없어 허름하고 거친 베옷을 입는 사람처럼 가난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빛나는 구슬을 품고 있으니 그게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요, 자기에 대한 지식이다. 비교해서 말하면 속세의 현명한 자들, 지식인들이란 속에는 진실로 가치로운 것을 품고 있지 못하면서(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하면서), 겉으로만 화려한 옷(세상에 대한 잡지식)을 걸치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석가세존이 가르친 부처의 길과 노자가 말하는 성인의 길이 그 본질에서 한 치도 다르지 않음을 본다. 자기가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이 부처고, 자기를 아는 자가 곧 성인이다.

 

‘시이(是以) 불아지(不我知)’라는 말을 똑바로 옮기면 ‘자기를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가 된다. 무엇이? ‘노자가 무지(無知)하라 말하는 이유가!’ 자신을 아는데 도움도, 소용도 안 되는 헛된 지식들이기 때문에 노자는 그런 것들을 익히고 배우지 말라는 것이다.


'老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덕경 72 大威   (0) 2011.05.18
덕경 71 病病   (0) 2011.05.17
덕경 69 用兵   (0) 2011.05.12
덕경 68 不與   (0) 2011.05.11
덕경 67 三寶   (0) 2011.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