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
是以 欲上民必以言下之 欲先民必以身後之
是以聖人 處上而民不重 處前而民不害
是以天下樂推而不厭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의 왕인 까닭은 그것의 본성이 아래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능히 모든 계곡의 왕이 된다.
그러므로 백성들 위에 서려고 하면 반드시 말은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백성들 앞에 서려고 하면 반드시 몸은 뒤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며, 앞에 있어도 백성들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천하가 그를 천거하기를 즐거워하고, 아무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런 인망은 남과 다투지 않으므로 천하가 그와 다툴 수 없다.
推 밀 추 厭 싫을 염
※ 이경숙 해설
‘이기선하지(以其善下之)’에서 ‘선(善)’은 ‘본성(本性)’이나 ‘성질(性質)’을 의미한다. ‘선(善)’이라는 글자는 ‘선위사자(善爲士者)’같은 말에서는 ‘잘, 훌륭한’ 또는 ‘착한’ 등의 형용사이지만, ‘수선(水善)’이나 ‘상선(上善)’ 같은 경우에서 보듯, ‘본성(本性)’이나 ‘성질(性質)’을 의미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강과 바다는 계곡마다 흐르는 조그만 시냇물이 모두 합쳐진 큰 물이다. 강과 바다에는 모든 계곡을 휘감아 흐른 물이 모두 모여 있다. 그래서 노자는 여러 곳에서 이러한 강과 바다를 계곡의 우두머리로 비유하고 있으며, 그것의 본성을 ‘아래로 지향하는 것’으로 보았다. 강은 언제나 양옆으로 자기보다 높은 계곡을 두고 그 사이의 가장 낮은 곳을 흘러간다. 바다는 모든 육지보다 낮은 곳에 모인 거대한 물이다. 강과 바다 등 모든 물은 낮은 곳으로 찾아 흐르기에 도자(道者)의 표상이고 덕(德)의 구현물이다. 이와 같이 물의 선(善)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음 구절을 보자.
정치라는 것이 천하의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행하여 지는 것이지만, 기실 정치하는 자들은 천하 만민의 위에 군림하여 견디기 어려운 짐이 되고, 백성을 인도한다고 앞에 서 있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데에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일 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인류의 역사에서 인민 대중의 삶이 짓눌리고 비참하였던 것은 대부분 그 이유가 정치인 또는 권력자라는 짐이 인민들에게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은 국민의 공복이 아니라 짐이며, 인도자가 아니라 방해물이며, 어떤 자들은 세상의 재앙이요, 우환이다. 문제는 이런 자들일수록 위로 올라가려 하고, 앞에 서려고 기를 쓴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위로 올라가려고 애쓰는 자는 끌어내리고, 앞에 서고자 하는 자를 뒤로 보낸다면 세상은 한결 살기 편해질 것이다.
이 장의 ‘낙추이불염(樂推而不厭)’도 유명한 말이다. 온 세상이 천거하고 추대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누구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좋은 권력이란 실력으로 쟁취하거나 힘으로 뺏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가 가져주기를 부탁하며 억지로 떠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천하를 떠맡기면서 온 세상이 즐거워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성인이며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여기서의 ‘부쟁(不爭)’은 문맥으로 보아, 세상이 천거하고 추대를 하게끔 인망을 가지고 다투거나 경쟁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어떠한 정치인도 사실은 그를 추대하기를 즐거워하는 지지자들이 있고, 어떠한 폭군도 그의 지지자가 있다. 정치와 권력의 이해관계상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지지자들의 추대를 ‘천하의 추대’로 위장하거나 과장한다. 한 줌도 안되는 소수의 지지와 응원을 천하의 민심이라고 강변하여 속이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사회라고 말하는 지금의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노자는 사족을 더 달아놓은 것이다. 천하가 기꺼이 추대하면서도 결코 그것을 위해 남과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성인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