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덕경 65 稽式

무위당 2011. 5. 4. 09:21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敵 不以智治國 國之福

知此兩者 亦稽式

常知稽式 是謂玄德

玄德深矣遠矣

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옛날의 도를 잘 닦은자는 백성들이 명민하지 않도록 했고, 장차 어리석게 하려고 하였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아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적이고,

지식으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나라에 복이 된다.

이 두 가지를 아는 것을 또한 계식(稽式)이라 하고,

계식(稽式)을 아는 것을 현덕(玄德)이라 한다.

현덕은 깊고 멀어서

현세와는 반대로 보이지만, 그런 후에야 대순(大順)에 이를 수 있다.

 

稽  생각할 계     乃  이에 내

 

※ 이경숙 해설

공맹(孔孟)을 비롯한 유가의 ‘어진 이’는 요순(堯舜)이 그 표상이고, 요순시대야말로 그들이 꿈꾸는 이상향이다. 그러나 도가에서는 요순시대의 인의의 정치는 결국 인위적인 것으로서 인간 사회에 이로움보다는 해로움이 더 컸다고 본다. 그렇다면 ‘고지선위도자(古之善爲道者)’는 요순보다 더 앞선 시대의 까마득한 옛사람들일 것으로 생각된다. 백성을 총명하게 하기보다는 우매하고 어리석게 만들어서 ‘우민낙원(愚民樂園)’을 실현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장자”의 ‘거협(胠篋)’편을 참조하자.

“참다운 덕이 유지되고 있던 시대는 어떠하였는가? 용성씨, 대정씨, 백황씨, 중앙씨, 율륙씨, 여축씨, 헌원씨, 혁서씨, 존로씨, 축융씨, 복희씨, 신농씨로 이어지던 시대가 있었으니, 그 때의 사람들은 새끼로 매듭을 묶어 글자로 삼았으며, 의식주와 풍속에 늘 만족하였으며,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릴 만큼 이웃나라가 가까이 있어도 왕래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야 말로 참으로 세상이 잘 다스려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람들이 모두 발을 세우고 목을 빼고 있다가 현자(賢者)의 소문을 들으면 부모를 버리고, 임금도 버리고 양식을 싸 짊어지고 달려가려 한다. 그들이 현자를 쫓아 달려간 발자취가 여러 나라의 국경을 연이어 지나고, 그들의 수레바퀴 자국은 천리 밖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지배자들이 지식을 좋아하는 잘못에서 비롯되었다. 지배자들이 지식만을 좇고 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천하는 크게 혼란해지고 말았다. 무엇으로 그렇게 잘못되었음을 아는가? 활, 쇠뇌, 그물, 주살, 덫, 올가미 등의 지혜가 많게 되자, 곧 새들은 하늘위를 어지럽게 날게 되었다. 낚시, 미끼, 그물, 전지그물, 투망, 통발 등의 지혜가 많아지자, 곧 물고기들은 물속을 어지러이 헤엄치게 되었다. 덫, 함정, 그물 등의 지혜가 많아지자 곧 짐승들은 늪 속을 어지러이 뛰어다니게 되었다. 지혜, 거짓, 속임수, 원한, 위선, 교활, 궤변, 논쟁, 의견의 차이들이 많아지면서 세상은 더욱 미혹되게 되었다. 세상이 이와 같이 크게 어지러워진 것은 사람들이 지식을 좋아했던 소치다. 그리하여 천하가 모두 모르는 것을 구하려고 들면서, 이미 아는 것을 실천할 줄 모른다. 모두가 불선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반대할 줄 알면서, 선하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반대할 줄 모른다. 그래서 크게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위로는 해와 달의 밝음을 어기고, 아래로는 산과 내의 정기(精氣)를 녹여버리고, 안으로는 계절이 베푸는 것이 무너졌다. 숨쉬며 움직이는 벌레나 날아다니는 새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 본성을 잃게 되었다. 심하도다, 지식을 좋아하는 것이 천하를 이토록 어지럽히다니? 하, 은, 주의 삼대 이후로 언제나 그러하였다. 농사짓는 백성들은 간사함이 날로 더해지고, 고요한 무위(無爲)는 버리고 남을 속이는 마음을 기뻐하는데, 그러한 습성은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거협(胠篋)’편 참조]


다음 구절은 ‘옛날의 선위도자(古之善爲道者)’가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었던 이유이다.

‘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敵 不以智治國 國之福 知此兩者 亦稽式 常知稽式 是謂玄德’의 구절은 노자의 일관된 ‘불상현주의(不尙賢主義)’의 피력이다. 노자가 주장하는 바는 현명함, 지식, 판단, 시비, 형벌, 인의 등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노자가 성인 정치에 있어서 필요없는 것이라 지목하는 모든 것은 사실상 정치의 토대가 되는 것들이다. 그것이 없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노자는 배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을 대신하여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 바로 ‘도(道)’다. 이 ‘도(道)’가 정치에 적용될 때의 이름이 ‘현덕(玄德)’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이상 국가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현덕을 갖춘 성인이 다스려야 하고, 반면에 백성들은 무지(無知)하고 ‘무욕(無欲)’하여야 하며, 나라는 작아야 하고, 사람은 멀리 왕래하지 않아야 하고, 물건은 질박하고, 옷은 남루하며, 음식은 조악하여야 한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이상국가의 모습이다. 우리가 썩 살고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그런 나라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인의를 강요하지 않아 공익과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이유도 없고, 전쟁터에 끌려나가 몸이 창칼에 찔리고 사지가 찢겨 죽을 일도 없으며, 남보다 무식하고 무능하여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상대적 빈곤이나 박탈감을 느낄 이유도 없다. 도적 맞을 물건이 없어 도적 맞을 걱정도 없을 것이고, 당연히 도적도 없을 것이다. 지시하고 간섭하는 관리나 법령도 없고, 비난과 수치를 느끼게 하는 도덕과 윤리도 강제되지 않을 것이다. 해가 뜨면 밭 갈고, 해지면 움막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몸을 눕히는 그런 세월, 그렇게 사는 한평생만이 권태롭게 널려 있을 것이다. 그 주장하는 바를 대체로 종합해 보면 노자의 이상 사회, 그 무릉도원 같은 유토피아는 이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사회에 느끼는 호감의 정도는 각 개인의 몫이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사회가 염원이 될 정도였다면, 노자 당시의 인간의 삶이란 무척 곤고하고 험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노자의 시대 이후 2천5백 년 동안 사람들의 삶은 짐승보다 오히려 처참했다고 할 수도 있다. 권력자들, 지식층들, 재산가들의 생활은 문화적이고, 고상하고, 화려하고, 영화로웠던만큼 대다수 인구의 서민 대중들은 그 삶이 야만적이고, 더럽고, 위험하고, 비참한 것이었다. 서양의 외세가 밀려들어오고, 근대적 시민정신이라는 것에 눈을 뜨기까지 노자와 석가세존을 제외한 모든 동양의 정치사상, 윤리 도덕은 모두 지배층의 이익에 봉사한 반민중적 이데올로기들이었다. 그것들이 한결같이 ‘인간의 도리’를 부르짖고, 천륜과 인륜을 주창한 바였지만, 그러나 실제로 민중의 삶은 짐승의 그것보다 별반 나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인간의 도리’,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능력과 가치’ 따위를 모두 팽개치자고 말한 노자야 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을 위하고 인민 대중을 연민했던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그리던 사회가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그다지 살고 싶어지는 낙원이 아닐지라도, 노자 이후 2천5백 년 동안 실재했던 사회, 국가, 그 삶의 수준과 인간의 운명들을 돌아볼 때에는 그것을 이상향이라고 부른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노자의 눈에 비친 인간의 사회는 끔찍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연민하였던 사람이 바로 노자였다.

 

‘계식(稽式)’은 번역하려고 골치 아파하지 말자. 문맥의 흐름으로 이 말뜻을 짐작하여야 하는, 노자가 붙인 이름이다.

 

노자는 자기의 말이 현세와 맞지 않는 이상론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앞서 말하기를 ‘자기의 도를 들으면 세상 사람들이 웃는다 하였고, 사람들이 웃지 않으면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는 자기 도의 실천인 ‘현덕(玄德)’이 실제의 세상과는 어울리기 힘든 것임을 토로하고 있다. 사람들을 어리석고 무지하게 만들고, 지(知)에 의존하지 않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은 어떤 점에서는 잠꼬대 같은 소리라는 것을 노자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노자는 ‘그러나’ 하고 말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천하는 올바르게 흘러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혹자는 노자의 이상 사회를 ‘원시적 공산사회’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노자가 꿈꾸었던 이상향은 ‘공산사회’라기 보다 ‘가족 공동체’ 같은 것이 아닐까. 그보다 큰 규모의 사회적 조직은 불필요하고,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기 힘들다고 노자는 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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