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道

명상에 대하여

무위당 2012. 3. 19. 16:41

명상이란 그대의 마음을 주시하는
간단한 방법이다.
마음과 싸우는 것도,
또 그것을 지배하는 것도 아닌
그저 거하면서 선택없는 주시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류의 사념이 오고 가든
아무런 판단이나 저항감 없이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사념을 구분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추한 사념이므로 나에게 와서는 안 되고
저것은 아름답고 고결하므로
가서는 안 된다는 식의 구분을 두지 마라.
그대는 구분하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판단없음의 상태로 남아야 한다.
그대가 판단하는 순간, 명상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념과 친구가 되든 적이 되든
판단하는 순간 동일시가 일어나고
그때 우리는 사념과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명상은 사념과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
전적으로 평정과 냉담함을 잃지 않은
관찰자의 자리를 지킬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각성이 일어나면서
사념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그대가 더 깨어있을수록 생각은 더 줄어들고
덜 깨어있을수록 사념은 늘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각성에 의해 조종되는 자동차와 같은 것이다.
그대가 완전히 깨어있으면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모든 사념은 멈춘다.
즉각적으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도로는 텅텅 비고, 다니는 차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명상인 것이다

천천히 천천히 그런 순간들이 다가온다.
텅 빈 공간이 다시, 또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거기에 점점 더 오래 거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대는 이 빈 공간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원하면 언제든지
아무런 노력 없이 이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공간은 신선하고 싱그럽다.
해서 그대를 진정한 그대 안에 거하게 한다.
그대라는 관념과 마음으로부터
그대는 자유롭다.
이제 그대는 편견의 흐림 없이 그대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대 자신을 아는 것은
가장 가치 있는 앎이다.
그리고 자신을 모르는 것은 모든 것을 놓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겠지만
그가 자신을 모른다면,
그가 자신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면
그는 그저 걸어다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불과하다.

각성 없는 자유는 무의미한 망상이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각성없이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없다.
그대의 무의식이 그대를 지배하고
그대의 깨어있지 못함이 그대를 좌지우지 하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대는 그저 본능과 무지함의 희생자일 뿐이다.

고로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은 전통과 사회, 지금의 체제를 따른다.
고루하고 진부한 사람들,
체제 순응자들… 그들은 군중을 따라간다.
그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또 반체제 기질을 가진이들도 있다.
틀에서 벗어난 자들, 방랑자들, 예술인들,
화가, 음악가, 시인들이 그들이다.
스스로 자신들은 자유로운 삶을 산다고 믿고 있겠지만
그건 그저 생각일 뿐이다. 전통에 반항할 뿐,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아직도 그대는 자연본능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정욕, 탐욕,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대는 절대 이들의 주인이 아니다.
그대가 바로 노예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란 오직 각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겠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변화 없이는
자유란 불가능하다.

그곳은 오직 소수의 몇 사람만이 도달한 곳으로
예수나, 장자
짜라투스트라, 붓다가 이들이다.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극소수의 사람들 뿐이다.
그들은 깨어 있는 삶을 살았기에
진정한 자유 속에 있었다.

좀 더, 조금 더 각성을 깨우는 것,
그것이 바로 구도자가 할 일이다.
그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자유란 각성의 꽃에서 피어나는 향기인 것이다.


               Osho: Eighty Four Thousand Poems, Chapte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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