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다산의 흔적을 찾아서

무위당 2010. 6. 30. 11:02

 

박형,

작년 늦가을 화창한 어느날 하루 휴가를 내고 홀로 강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다산 선생의 흔적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곳에 갔었지요.
 
강진 시내에 있는 동천어사라는 주막집.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놓은 초가 주막집으로 다산이 처음 강진으로 유배와 3 여년 머물던 곳이지요.
인생의 절정기인 40세의 다산이 천리 외진 시골 조그마한 주막집에서 유배의 몸이 되어
한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다산의 그 참담한 심정이 느껴지더군요)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주모가 재능을 살려서 동네 애들이라도 가르치는게 어떠냐는 충고에
마음을 다잡고 그곳에 四宜齎라는 현판을 내걸고 서당선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의재...
마땅히 지켜야할 4가지 마음가짐 즉,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옮긴 거처가 다산초당.
원래는 산속에 있는 초가였는데 지금은 새마을운동 덕분인지 기와집으로 복원되어 있더군요.
그리 깊은 산속은 아닌데 초당마루에 앉아 있으니 산새소리외에는 고요하기만한 적막강산이더군요.
방안에는 다산의 초상이 모셔져 있는데 백범이 쓰던 동그란 안경과 비슷한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가 유배 세월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그 방대한 저술을 했던 곳입니다.
어느 분은 다산의 유형으로 한국 근대사에 빛나는 학문적 성과를 볼 수 있었던 점을 크게
평가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다산이 조정에 중용되어 포부를 펼칠 수 있었다면
일본의 명치유신에 버금가는 혁명이 일어나 조선이 침몰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초당 옆에 장방형의 작은 연못을 만들고 이곳에 잉어를 키웠는데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제자들이 찾아오면 잉어 안부를 묻곤 했다고 합니다.
연못의 특징은 물을 끌어들이는 방식에 있는데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 수로를 만들었지요.
이 내용은 다산의 어느 저술에서도 언급되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쉬운 발상은 아닌데 거기서도 엔지니어 다산을 봅니다.
 
초당에서 산속 오솔길을 따라 한 20분 산을 넘어가면 백련사가 있는데 절 옆에 동백림이 장관입니다.
이 오솔길을 따라 다산은 백련사 혜장 스님과 많은 교류를 했다고 합니다.
천주교도와 스님의 교류라...
모든 종교의 근원은 한 뿌리임을 어느 민족들보다도 명료하게 깨달은 우리 선조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배경이지요.
나도 그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그 분들과 교감을 해 보았습니다.
 
조선시대 많은 선비들이 유형을 받으면 신세 한탄과 술로 인생을 마쳤다고 하는데
다산은 그 길고 고독한 환경에서도 불후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과거의 영광도 미래의 불안도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지금 여기 현재에 충실하는 삶의 귀감입니다.
다산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은 타인과 치루는 경주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경주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다산은 인생 경주에서 우승하신 분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주막 <동천어사>   ※ 지금도 주막이 운영되고 있어 여행길 요기 가능

            주막 <동천어사>

            서당 <사의제>

            사의제 연못

            사의제 전경

            다산초당

            다산초당 연못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의 노래  (0) 2010.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