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덕경 67 三寶

무위당 2011. 5. 9. 08:39

天下皆謂 我道大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久矣其細矣夫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慈 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以慈衛之

 

천하 모두가 말하기를, 나의 도는 크기는 하지만 불초한 것같다고 한다.

대저 오로지 크다 보니 그것을 불초하다고 하는 것이다.

나의 도가 다른 것과 닮았다면 그것은 작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오랫동안 지녀 온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그 첫째가 자애요, 둘째가 검소함이요, 셋째는 감히 천하의 앞에 서지 않는 것이다.

자애하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으며, 검소하므로 널리 베풀 수 있고,

천하의 앞에 서지 않으므로 오래 보존되는 그릇이 된다.

요즘 사람들은 자애를 놓아두고 우선 용감해지려 하고, 검소하지도 않으면서 우선 베풀고 싶어 한다.

놓아둔 것을 뒤로 미루고, 우선 하려고 드는 것을 앞세우면 그 결과는 죽음이다.

    (지금 자애를 버리고 용맹을 취하고, 검약을 버리고 넓게 펼칠려고만 하고,

     뒤에 서는 것은 버리고 먼저 나서기만을 취하니, 결국 죽음밖에 없는 것이다.)

대저 자애로써 싸우면 곧 이기고, 이것으로써 지키면 곧 견고하다.

자애가 그를 싸고 있으니 천장이 그를 지킨다.

 

似  같을 사     肖  닮을 초     夫  사내 부 (발어,지시,감탄사)     矣  어조사 의    

舍  집 사, 놓아둘 사, 버릴 사     且  또 차, 우선 차

 

※ 이경숙 해설

‘불초(不肖)’라는 말은 ‘닮지 않았다’는 말인데, 무엇을 닮지 않았는가? 그 아버지를 닮지 않아 자질과 역량이 없는 못난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모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말할 때 ‘불초 소자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어떤 대상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거나 못난 상태를 이르는 것이다. 그러면 ‘도(道)’가 불초하다는 것은 무엇과 비교하여 그렇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 보편적으로 도라고 불러온 그 무엇에 비하여 노자가 말하는 도가 불초하다는 말이다. 이 도라는 이름은 노자만 사용한 독점물이 아니라, 공자도, 맹자도, 묵자도, 손자도, 모두가 이 도라는 말을 보통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 의미는 ‘하늘의 뜻’, ‘천지의 이치’, ‘사람의 도리’, 당연히 그래야 하는 당위적인 법칙‘ 등등이다. 물론 제자백가마다 이 도의 구체적인 설명이 약간씩 다르다. 하지만 대체로 도라고 할 때의 의미는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독 노자가 말하는 도는 보편적인 상식을 깨뜨리고 파격적이고 역설적인 것이어서 ’저런 것이 과연 도일까?‘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이다. 노자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천하의 사람들이 자기의 도를 보고 ’크기는 하지만 불초스러운 도라고 말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사람들이 자기의 도를 불초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상식을 깨뜨리고, 통념을 뒤집는 파격성이나 논리적 역설, 그리고 성공이나 출세에 대한 무용성에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다른 학파나 학자들이 주장하는 도에 비해 그 뜻이 너무 크고 높기 때문에 자기의 도가 불초하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약초(若肖)‘, 즉 보편적으로 말해지는 도와 비슷할 것 같으면 진작에 그것은 작아졌을 것이라고 한다. 노자는 세상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고 해서 도에 대한 자신의 이론과 주장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온 세상이 비웃어야 그것이 도라고 말했던 사람이 아닌가.

 

‘약초구의기세의부(若肖久矣其細矣夫)’에서 ‘약초(若肖)’는 ‘불초(不肖)’의 반대어로 ‘만약 닮았다면’의 뜻이다. 즉 노자가 말하는 도가 일반적인 도의 개념과 비슷한 것이라면 ‘구의(久矣)’, 즉 ‘오래되었을 것이다’고 말한다. 무엇이 오래되었는가? ‘기세의부(其細矣夫)’니까, ‘작고 천해진 지가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세(細)’는 ‘잘다, 작다’는 뜻도 있지만 ‘천하다’는 뜻도 있어 ‘세인(細人)’이라고 하면 ‘천한 신분의 사람, 노비’를 뜻한다. 강조하는 어조사 ‘의(矣)’를 빼고 ‘세부(細夫)’라고 읽어도 뜻은 같다. ‘세의부(細矣夫)’는 ‘세부의(細夫矣)’와 같은 말이다.

 

도(道)의 불초(不肖)에 대한 계속되는 변명이다. 노자의 도를 듣노라면 노상 하는 소리가 ‘남의 뒤에 서라, 남의 밑으로 들어가라’ 따위의 소리 뿐이다. 누구나 생각하기를 ‘저런 도를 어디 쓸 것인가? 저런 도를 익혀봐야 아무 도움이 안되겠군’하고, 노자의 도는 살아가는데 별 소용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십상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노자의 도는 다른 학파의 도와 비교 했을 때 가치와 서열이 처지는 불초한 도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노자는 자기의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자신의 도는 자애와 검소함과 천하의 앞에 서지 않는 것을 보물로 삼는 것이라고 외쳐 말한다.

 

도에 대한 노자의 옹호는 계속된다.

‘기장(器長)’이란 ‘아주 뛰어난 그릇, 길이 보존될 그릇’을 뜻하는 말이다.

'기(器)’는 제41장 ‘대기만성(大器晩成)’부분을 참조하면 되지만, 부연하여 설명한다면, 노자가 말하는 기(器)는 우리가 흔히 사용는 국그릇, 밥그릇 등이 아니다. 우리가 늘 쓰는 그릇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 지내는 도구로서 크기도 대단히 크고 중요하며 으뜸인 물건이었다. 기(器)는 ‘정(鼎)’, ‘반(盤)’, ‘유(卣)’, ‘궤(櫃)’, ‘관(罐)’ 등 수많은 종류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 재질도 흙으로 빚고 불에 구워 만드는 도기(陶器)가 아니라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았다. 수백개 이상의 거푸집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는 거대하고 정교한 당시의 청동기들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당시에 만들어진 청동기의 수량도 엄청났을 것으로 보이며, 제작에 필요한 시간도 대단해서 하나의 청동기를 몇 개월 혹은 몇 년에 걸쳐서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노자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릇(器)하면 밥그릇, 국그릇을 떠올리는 현대인들에게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당연히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사(舍)’는 ‘집’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놓다, 버려두다, 폐하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글자다. 그래서 ‘사자차용(舍慈且勇)’은 ‘자애로움은 내어 던지고 용감해지기부터 먼저하려 든다’는 뜻이고, ‘사검차광(舍儉且廣)’은 검소하지도 않으면서 베풀 생각부터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순서를 따질 때 먼저 자애로워진 다음에 용감해져야 하고(그렇지 않으면 흉폭해질 따름이니까), 먼저 검소해진 다음이라야 베풀 수 있는데(그렇지 않으면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없으므로), 사람들은 자애와 검소함을 뒤로 미루고 우선 하려고 드는 용기와 베푸는 것을 앞세우려 한다는 소리이다. 이것이 ’사후차선(舍後且先)이다. ‘사(舍)’하여 뒤로 돌리는 것(後)은 ‘자애’와 ‘검소’ 두 가지 이고, ‘우선(且) 성급하게 앞세우는(先)’ 두 가지가 바로 ‘용기’와 ‘베품’이다. 이렇게 선행되어야 할 것을 무시한채 용기를 발휘하고 베풀려고 들면 돌아오는 것은 죽음이라고 노자는 말한다. 자애가 없는 용기는 만용이고 난폭함이 될것이 틀림이 없고, 검소하지 않은데 널리 베푼다면 그것은 부정한 재물이거나 도둑질한 보화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끝은 죽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천장구지(天將求之)’를 흔히 ‘하늘이 장차 이를 지켜준다’로 해석하는 책들이 많은데, 여기서 ‘장(將)’은 ‘장차’라는 의미로 쓰인 글자가 아니고 ‘장수 장’이다. 즉 ‘천장(天將)’은 ‘하늘의 장수’인 것이다. 하늘이 장군과 군대를 보내어 그를 지켜준다는 말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안전할 것이다’는 이야기다. 왜 하늘이 그를 지키고 돕느냐 하면, ‘이자위지(以慈衛之)’ 즉 ‘자애가 둘러싸고 호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장(神將)들이 둘러싸서 수호하고 있는 자비로운 보살도(菩薩圖)’가 연상된다. 자비심이 없는 용기는 죽음을 자초하는 만용이지만, 자애는 하늘이 그를 지켜주므로 세상의 그 어떤 용기보다. 더 강력하고 든든하다는 노자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노자의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도(道)는 도답지 못하고 불초(不肖)한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학파에서 말하는) 그 어떤 다른 도보다 더 크고, 뛰어나고, 고차원적이며, 더 막강한 도라는 것이다.